연필

시 -1 2006. 4. 23. 11:00

  

 연필

                                                  차옥혜

 

 

잘못을 비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키를 낮추며

언제고 거듭남이다

새 출발이다 자유다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들어오고 나간다

단 한 번의 화살로

과녁의 중심을 꿰뚫어야하는

지워도 흔적이 남아 족쇄가 되는

만년필과 볼펜의

독재성 폭력성 기계성 야만성을

거부한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시작이다

마지막까지 누리는

자유의 향기

당당하게 소멸을 드러낸다

 

연필로 너에게 간다

 

<문학과창작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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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시 -1 2006. 4. 22. 11:17

   

 서시

                                                                   차옥혜

 

바람이 부네

밟혀 일어서지 못하는 풀들

일으키려

바람이 부네

두더지가 갉아먹은 뿌리

그 상처 어루만져

잔뿌리 키워주려

바람이 부네

가뭄에 목 타는 잎새

싱싱한 푸른 잎으로

다시 살라고

바람이 부네

이 벌판 가녀린 풀잎으로

흔들리는 것이 서러워

흐느끼는 풀에게

네가 바로 하늘이다

너의 흐느낌은

어둠을 쫓는 노래이고

너의 흔들림은 빛을 몰아오는 춤이다

라고 속삭이며

바람이 부네

어제 죽고 오늘 죽은 풀들

내일 다시 태어나고

눈보라에 떠난 풀들

봄날에 다시 돌아오는

보라

너희는 죽지 않는 생명

영원히 이 벌판을 지키리니

나 바람이 너 풀이고

너 풀이

나 바람이다

는 것 보여주려

바람이 부네

풀벌레와

두더지도

이빨을 잠재우고

한 점 바람으로

풀잎과 함께

바람길로 오라고

바람이 부네

하늘을 열고 열어

눈부신 새 빛을

풀들의 가슴에 안기려고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부네

 

<서사시 바람 바람꽃』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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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구조와 표현의 단면

  이향아(호남대 명예교수시인)

 

 

내가 길을 떠나는 것은

장미나 백합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소낙비에 목숨을 대고

타는 목마름 견디고 견디느라 가시 돋은 몸에

눈부시고 아름답게 핀

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나 계곡을 낀 마을이나 도시에도

드문드문 사막은 있어

선인장 꽃 만나면

고개 숙여 절하고

숨죽여 우러르며

비는 왜 제멋대로만 오는가

물은 왜 흐르는 데만 흐르는가

묻고 묻다가 해가져

선인장 꽃 타는 눈동자만 안고

귀가하지만

내일도 모래도 나는

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순례자이리라

-차옥혜 선인장 꽃을 순례하다 

 

지금까지 필자가 읽어온 차옥혜의 시는 언제나 휴머니즘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지난 호에 게재된 세 편의 시 가을 고목의 눈물」 「선인장 꽃을 순례하다」 「떠돌이 별의 공통점 역시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이란 입으로만 말하고 지나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사랑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며 감사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봉사와 실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우리는 시인의 삶의 주제, 삶의 목적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내가 길을 떠나는 것은/ 장미나 백합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비장하게 선포한다. 선인장 꽃은 사막의 모래밭에 피지만, ‘강이나 바다나 계곡을 낀 마을이나 도시에도/ 드문드문 사막은 있어선인장 꽃을 만나면 반갑게 절하고 숨죽여 우러르면서 선인장 꽃이 겪는 삶의 아픔, 그 곤고함의 궁핍함을 시인이 마냥 죄스러워한다.

비는 왜 제멋대로만 오는가/ 물은 왜 흐르는 데만 흐르는가/ 묻고 묻다가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을 개탄하는 시인, 그러다가 해가 지듯 귀가하는 시인의 정신세계. 그는 내일도 모래도 선인장 꽃을 찾아 순례할 것임을 공고하게 발표한다.

이러한 주제의 시는 떠돌이 별에서 더욱 표면화한다. ‘떠돌이 별로 은유한 시의 제재는 시인의 온정과 염려의 대상인 노숙자나 무주택자를 포함하는 빈자가 될 것이다. 누가 그걸 원했겠느냐. 누가 붙박아 살고 싶은 희망을 품지 않았겠느냐. 불가피한 상황이 떠돌이별을 정처 없이 흐르게 하고 춥고 배고프게 하고 주눅이 들게 하였을 것이라고, 시인은 변호한다. 그리고 밤하늘로 표현된 어둡고 추운 세상, 떠돌이 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깊고 너무 넓으며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세상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의 마음은 긍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사랑과 긍휼은 가을 고목의 눈물에서 감사로 연결된다.

 

<창조문예 20092월호 239-240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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