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사람 1

시 -1 2006. 5. 5. 14:51

  

 흙사람 1

                                                         차옥혜

 

 

길을 가며

 

민들레와 씀바귀와 노루귀와 앵초와

이야기한다

활활 거리는 나비와 껑충대는 여치와

발발거리는 개미와 파르륵 대는 딱정벌레와

노래한다

물방개와 모래무지와 물옥잠과 물총새와

인사한다

옷깃에 스치고 먼발치서 풀썩이는 것만이

형제랴

발부리 자갈도 깊은 산 속 옹달샘도

정성껏 정갈하게 대접하며

땀흘려 사랑하며

길을 간다

 

<꿈과시  199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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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 -편지 1

시 -1 2006. 5. 5. 14:50

  

 고목  

             -편지 1

  

                                                                차옥혜

 

껍질만 남아 있던 사랑마저도 떠나고

뒤틀린 등과 저승꽃 핀 얼굴과

아무리 가리려 해도 다 드러나는

훵하게 뚫린 못 생긴 가슴만 남았습니다.

젊은 날 아름답던 그림자를 두고 온

그 언덕과 해변과 거리를

되새김질할 위장도 헐어버렸습니다.

온몸이 얼음덩이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며 살아왔습니까.

이제 의지할 것은 내게 걷어채고 짓밟히면서도

내 불거진 뿌리를 꼭 잡고 버틴

당신뿐입니다.

그동안 내가 기댄 것은

바람벽이 아니라

당신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

나마저 나를 버리고서야

나는 돌아갑니다

당신에게

나는 껴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엇인

침묵이면서 소리인

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

당신을

 

<시집 『흙바람 속으로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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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도를 달리는 열차

                                                         차옥혜

 

철암에서 밤 11시발 서울행 태백선 열차를 탄 송씨는

10여 년 전 탄광촌에 들어올 때는 한밑천 모아

곧 도시로 떠날 줄 알았다는 송씨는

탄광이 폐쇠되자

병든 몸에 빚만 남았다는 송씨는

가난 때문에 엄마마저 버리고 간

빈집들 틈에서 대낮에도 무서워하는

잠든 어린 자식들의 머리밭에

'아빠가 서울 가서 일자리 구하는 데로 데리러 오마'

편지 써놓고 왔다는 송씨는

"가도가도 나에겐 세상이 왜

캄캄한 갱 속이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열차 타고 가면 새끼들의 밥그릇이 될

막장이 나올까요?"

옆 좌석 낮선 나에게 눈시울 붉히며 물어본다.

지하 7000미터 아래서 고무장화 신고 석탄을 캐다보면

어느덧 불붙은 연탄이었고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며 땅굴을 파들어 갈 땐

어쩔 수 없는 탄가루 흡입기가 되고

갱 밖에선 연탄재였다는

그래도 지금은 그런 막장이라도 간절하다는 송씨는

여기저기 승객들이 졸고 있는 야간열차에서

눈 한번 붙이지 못한다.

"아주머니, 평생 막장을 찾아다니는

막장꾼의 가슴에선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압니까?"

송씨는 숨막히게 기침을 하다가 더듬더듬 말한다.

 

<시집 『흙바람 속으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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