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편지 1

시 -1 2006. 5. 5. 14:50

  

 고목  

             -편지 1

  

                                                                차옥혜

 

껍질만 남아 있던 사랑마저도 떠나고

뒤틀린 등과 저승꽃 핀 얼굴과

아무리 가리려 해도 다 드러나는

훵하게 뚫린 못 생긴 가슴만 남았습니다.

젊은 날 아름답던 그림자를 두고 온

그 언덕과 해변과 거리를

되새김질할 위장도 헐어버렸습니다.

온몸이 얼음덩이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며 살아왔습니까.

이제 의지할 것은 내게 걷어채고 짓밟히면서도

내 불거진 뿌리를 꼭 잡고 버틴

당신뿐입니다.

그동안 내가 기댄 것은

바람벽이 아니라

당신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

나마저 나를 버리고서야

나는 돌아갑니다

당신에게

나는 껴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엇인

침묵이면서 소리인

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

당신을

 

<시집 『흙바람 속으로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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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도를 달리는 열차

                                                         차옥혜

 

철암에서 밤 11시발 서울행 태백선 열차를 탄 송씨는

10여 년 전 탄광촌에 들어올 때는 한밑천 모아

곧 도시로 떠날 줄 알았다는 송씨는

탄광이 폐쇠되자

병든 몸에 빚만 남았다는 송씨는

가난 때문에 엄마마저 버리고 간

빈집들 틈에서 대낮에도 무서워하는

잠든 어린 자식들의 머리밭에

'아빠가 서울 가서 일자리 구하는 데로 데리러 오마'

편지 써놓고 왔다는 송씨는

"가도가도 나에겐 세상이 왜

캄캄한 갱 속이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열차 타고 가면 새끼들의 밥그릇이 될

막장이 나올까요?"

옆 좌석 낮선 나에게 눈시울 붉히며 물어본다.

지하 7000미터 아래서 고무장화 신고 석탄을 캐다보면

어느덧 불붙은 연탄이었고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며 땅굴을 파들어 갈 땐

어쩔 수 없는 탄가루 흡입기가 되고

갱 밖에선 연탄재였다는

그래도 지금은 그런 막장이라도 간절하다는 송씨는

여기저기 승객들이 졸고 있는 야간열차에서

눈 한번 붙이지 못한다.

"아주머니, 평생 막장을 찾아다니는

막장꾼의 가슴에선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압니까?"

송씨는 숨막히게 기침을 하다가 더듬더듬 말한다.

 

<시집 『흙바람 속으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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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차옥혜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길 가던 사람이

늙은 느티나무 휑하게 삭은 몸통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50여 년 사막을 건너다보니

내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바람이 집을 짓고 새떼가 날고

강물이 흐르고 풀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춤을 춘다.

한 아주머니가 애 낳은 딸에게 고아주려고

호박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속이 텅 빈 것을 고르고 있다.

 

<작가  1997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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