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뿌리 4

시 -4 2021. 5. 7. 19:22

연뿌리 4

                                   차옥혜

줄기, 잎, 꽃, 연밥은
겨울을 건너지 못하지만
나는 순조롭게 건너 해마다
새 줄기, 잎, 꽃, 연밥을 낳아
봄, 여름,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감옥인 줄 안 진흙구덩이와 연못이
오히려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나를 먹이고 기르며 살리는
신의 품입니다
눈이 내리고 연못이 꽁꽁 얼어도
나는 멀쩡하게 편히 누워
새 봄을 준비합니다
투박하고 못 생긴 나를
언제나 꼭 껴안아주는
진구렁은
아무리 가물어도
나를 목마르지 않게
흠뻑 적셔주는
연못은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은혜의 순환 없이
어찌 세상이고 생명이겠습니까
어느 날 사람의 몸을 지날 때
연꽃등을 켜 어둠을 거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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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옥혜 시집    『말의 순례자』

                                                                                              정유준(시인)

  세계 제2차 대전을 무대로 한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가 있다. 독일공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위기에 놓이자, 말더듬이 국왕 조지 6세가 각고의 노력 끝에 라디오를 통해 명연설을 남긴다. 절박한 순간의 진정성이 영국 사회를 감동의 단결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는 줄거리이다. 말을 잘 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도 말을 잘한다는 것은 어쩌면 쉽게 시를 쓴다는 것과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감동의 언어이며 성찰의 언어이기에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말을 해야 맛이 난다.

  차옥혜 시인은 시집 말의 순례자첫머리에 우주에서 빛나는 별들의 근원과 신비를 찾아가는 말의 순례자로서 진실, 생명, 평화, 사랑이 담긴 말을 찾는 것을 기뻐하겠다.”-고 했다. 태어나 말을 배우고, 자라고, 말로 살고 있으니 참말만을 하는 절제된 자세로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자연에서 서정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는 현실의 고단함과 신산함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움과 온기로 시월 햇빛 밝은 길에 내가 있다, 마른 수국 꽃, 남색, 쌓아둔 책을 버리며, 쑥국을 먹으며, 74편의 작품들에서 진정성과 시어(詩語)의 선택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자연과 인간의 내밀한 관계에 대한 시의 정신은 정갈하고 정직해야 한다. 어떻게 사유하고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는지는 시인의 몫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성지를 답사하는 순례자처럼 말의 형상화에 있어 첨삭의 심판자이자 구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론가 이승원(서울여대 명예교수)태초의 창조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사물이 창조되면 그에 대해 이름을 붙였고 말로 지시하면 그것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말은 창조의 도구이자 동력이고 사람들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말로 발성하게 된 그것이 시의 원형이 아니겠는가. 차옥혜 시인의 언어에 대한 헌신적 자세, 자연을 통한 내면의 표현, 이 두 측면에서 시의 본질 탐구에 주력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고했다.

  시집 깊고 먼 그 이름, 바로 오는 그 사람, 흙바람 속으로, 아름다운 독,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 허공에 싹트다, 식물 글자로 시를 쓰다, 날마다 되돌아가고 있는 고향은, 씨앗의 노래, 시선집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하늘등에 이어 13번째 시집이다. 시집숲 거울2016년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되었다.

                                                                                                                            『시문학』 2021년 5월호 195〜196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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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은

시 -4 2021. 4. 30. 14:39

사람만은

                                    차옥혜

 


백합, 노루오줌, 범부채 곁에
나무쑥갓을 심었더니
나무쑥갓이 왕성한 번식력으로
빈틈없이 새끼를 치며
백합, 노루오줌, 범부채를
침략하여 덮어버리고 고사시켜
어느덧 나무쑥갓만의 왕국을 이루었다

풀꽃들 뿐이랴
평화롭고 순해 보이는 큰 나무들도
땅 밑에선 뿌리들 끼리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한다

동물 세계는 더더욱
강자만이 꽃이 되는 세상이라지만
사람만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 내려놓고
약한 사람 앞에 고개 숙인 벼가 되고
종이 다른 뭍 생명에게 언덕이 되며
모든 목숨이 함께 살고 승리하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

                                         <문학과창작,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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