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적(多聲的) 사랑의 순연한 파동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1. 말과 자연

  태초의 창조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사물이 창조되면 그에 대해 이름을 붙였고 말로 지시하면 그것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말은 창조의 도구이자 동력이었다. 인간 역사가 시작된 후 사람들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간명한 말로 발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시의 원형이다. 시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발생한 말의 가장 순수한 결정(結晶)이다. 그 이후 시는 말의 가장 다정한 동행자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횔덜린 시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다. 여기 나오는 존재(Sein)는 하이데거의 독특한 개념으로, 개별 대상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을 뜻한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가시적 현상계의 본질이 언어 속에 담겨 있음을 밝힌 것이다.

  차옥혜 시인은 열세 번째 시집의 여는 시 「나는 말의 순례자」에서 자신이 말의 종족으로 태어나 말로 자라고 말로 세계를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시의 본질이 말에 있음을 자각하고 말의 사도(師徒)로 살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 그것은 “내가 아는 말은 참 말의 일부”라는 구절이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감추고 있기에 대상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기는 힘들고 시인은 고투의 과정을 거쳐 본질의 일부에 접촉할 수 있을 뿐이라는 하이데거의 생각과 통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시인은 “빛나는 별들의 근원과 신비를 찾아 가는” 말의 순례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끝내 말의 고향에 이르지 못해도” 말의 순례자임을 기뻐하며 탐구의 길을 계속 걸을 것임을 천명한 점이다. 완성을 장담하지 못해도 탐구의 길을 계속 걸으리라는 의지가 중요하다. 이 구절은 차옥혜 시인이 시와 말의 본질에 투철하고 그 근원을 밝히기 위해 진력하는 시인임을 분명히 알려준다. 시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미완성의 순례를 지속하는 행위다.

  차옥혜 시인의 작품에는 자연을 소재로 삼은 것이 많은데, 이것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인식 대상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은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연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도의 기술 문명 속에 사는 현재의 인간은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 인간은 태초부터 자연과의 관계 속에 살아오면서 자연을 다양한 형태로 수용하고 다양한 의미로 표상해 왔다. 자연은 사람들의 심정 상태에 따라 각양각색의 표상으로 수용되었다. 인간은 문학 작품을 통해 자연에 대응하고 맞서면서 삶의 영역을 확장해 간 기록을 남겼는데, 시는 특히 장르의 속성 상 더욱 섬세하고 내면화된 탐구의 궤적을 문화유산으로 남겼다. 차옥혜 시인도 자연을 통해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데 주력해 왔으니, 시의 본질에 바탕을 둔 작업을 전개한 것이다.

  요컨대 차옥혜 시인은 언어에 대한 헌신적 자세, 자연을 통한 내면의 표현, 이 두 측면에서 시의 본질 탐구에 주력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자연과 인간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시인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며 그것이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세부적인 국면으로 들어가 보겠다.

2. 자연과의 동일감

  시집 권두에 놓인 시월 햇빛 밝은 길에 내가 있다를 보면 시인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어떠한 언어를 모색하는지 그 사유와 실천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시인은 시월의 환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있다. 그는 햇빛이 자신과 길을 함께 껴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연이 무한한 포용의 손길로 모든 물상을 끌어안는 것이다. 자신이 햇빛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자신을 껴안는다고 한 것이 중요하다. 자연이 인간과 길을 구분하지 않고 평등하게 수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평등한 수용의 결과 길에서 햇빛이 반짝이듯이 내 몸에서도 햇빛이 반짝이게 된다. 햇빛 속에서 길과 내가 평등하게 반짝이는 물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상상의 영역 속에 이루어지는 기적의 실현이다. 이에 시인은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끼고 자연이 선사하는 축복에 환희한다. 시월 햇빛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동감의 세계로 진입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향유한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동일화 체험을 공유하게 되자 미미한 겨우살이를 통해서도 삶의 교훈을 얻는 신비로운 사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늘이 싫어
  하늘에서 살고 싶어
  오르다 오르다 못 올라
  참나무 우듬지에 뿌리내려
  마냥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에 집 짓는 꿈을 꾸는 너
  꿈에 물들어 겨우살이에도
  푸르러 푸르러 아름다운 너

  지상의 헐벗은 목숨에게도
  뿌리내릴 참나무 있어라
  하늘에 꿈을 심어
  싹 튼 꿈으로 연명하며
  혹독한 겨우살이 이겨내어라
                                                     - 「겨우살이」 전문

  앞에서 본 「나는 말의 순례자」에서 시인이 “광활한 말의 우주”를 항해하며 “빛나는 별들의 근원과 신비”를 찾아 간다고 밝힌 것처럼, 시인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광명을 추구하고 숭상하는 존재다. 그는 그늘의 어두움을 거부하고 하늘의 밝음을 지향한다. 그러한 존재의 표상으로 시인이 발견한 것이 겨우살이다. 겨우살이는 참나무 같은 커다란 교목 위에 기생하는 상록의 관목으로 겨울에 교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져도 높은 가지 끝에 파랗게 살아 겨울을 버틴다. 그래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인은 이 겨우살이의 모습에서 그늘에서 벗어나 하늘의 광명을 지향하는 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로 오르려는 의지와 소망 때문에 종국에는 참나무 우듬지에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에 집 짓는 꿈을 꾸는” 존재가 겨우살이다. 이것은 시인의 존재론적 지향을 겨우살이에 투사한 것이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도 하나의 꿈만을 간직한 채 혹한을 견디는 겨우살이를 시인은 “푸르러 푸르러 아름다운 너”라고 찬미한다. 시인은 참나무 우듬지 끝의 파릇한 겨우살이를 바라보며 “지상의 헐벗은 목숨에게도” 뿌리내릴 나무가 있어 “하늘에 꿈을 심어” 그 꿈의 힘으로 살아남아 “혹독한 겨우살이 이겨내어라”라고 당부한다. 시인의 간절한 당부는 겨우살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시인을 향한 것이다. 지상의 생을 견디며 밝은 하늘로 가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겨우살이로 표상한 것이다. 

  겨울의 혹한에 뿌리를 내리고 겨울을 이겨내고 잎을 피워 알찬 결실을 거두는 모습은 「마늘」에서 더욱 뚜렷한 윤곽으로 형상화된다. “눈이 쌓이고/찬바람 몰아치며/꽁꽁 언 땅에/뿌리를 내리고 싹터/당당하게 겨울을 건너는” 마늘을 “님”이라고 찬양하면서 경의를 표한다. 마늘의 생리를 본받아 “나도 당신처럼/내게 닥친 두렵고 떨리는/겨울을 이기고/다시 봄날에 푸르른 잎을 흔들며/맵고 알찬 육 쪽 새끼들을 다시/거느리고 싶습니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경건하게 밝힌다. 이처럼 자연은 동일화의 맥락 속에 시인의 이상을 대신 실현하는 상징의 사물로 나타난다.

  시인이 지향하는 자세가 자연 형상을 통해 더욱 집중적으로 표현된 작품이 연뿌리를 소재로 한 네 편의 「연뿌리」 연작이다. 「연뿌리 1」은 연꽃과 연뿌리의 관계에 주목하여 연꽃의 아름다움이 연뿌리에서 기원했음을 밝혀 뿌리의 소중함을 언명했다. 「연뿌리 2」는 연뿌리의 모양을 관찰하여 생리와 의지를 표현했다.

  꽉 조이는 진흙 감옥에서 태어나  
  일생 연못을 받치고 살아
  힘들고 힘겨워서
  몸속에
  구멍이 숭숭 났을까

  아니면
  사방 길이 막혀

  눈 뜨고도 눈멀어
  제 몸에라도 더듬더듬
  길을 낸 것일까

  아니면  
  답답하고 막막함 견디려고
  제 몸을 뚫어
  꽃무늬를 놓았을까

  생이여  
  생의 무늬여
                               - 「연뿌리 2」 전문

  식탁에 오른 연근을 더러 보기도 했지만 그 모양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없는데 시인은 연뿌리의 안과 밖을 유심히 살펴 인고의 과정이 반영된 흔적을 찾아냈다. 연꽃은 진흙이 가득한 연못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 진흙 위에 연못의 물이 가득해서 숨이 막힐 듯한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연꽃이 자란 환경을 꽉 조이는 진흙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가혹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생 연못을 받치고사는 것이 연꽃의 숙명이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연뿌리에 힘들고 힘겨워서/몸속에/구멍이 숭숭 났을까라고 상상했다. 몸에 구멍을 숭숭 내면서 힘들게 자신의 줄기를 밀어 올려 연못 위에 연잎을 펼친 것이다. 진흙과 물의 중량이 압박을 하니 사방 길이 막혀/눈 뜨고도 눈멀어/제 몸에라도 더듬더듬/길을 낸 것이라고 상상했다. 시인은 그 갸륵한 인고의 노고를 달래 주려는 듯 연근의 구멍을 꽃무늬로 전환 표현한다. 그래서 답답하고 막막함 견디려고/제 몸을 뚫어/꽃무늬를 놓았을까라고 노래한다. 연근에 난 작은 구멍들이 모두 인고의 과정에서 얻은 생의 무늬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생이여/생의 무늬여라고 찬탄을 보낸다. 시인도 뿌리의 정신을 잃지 않고 인고의 무늬를 마음에 새기고 생명의 개화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영탄한 것이다.

  「연뿌리 3」은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진흙 밭 감옥을 탈출하여/못을 헤치고/미지의 세계로 날아오르고 싶어/혼신의 힘으로 몸부림쳐/내 몸에 순을 내고 키워/물 위로 솟아/넓은 잎에/개구리 잠자리 물방개 쉬게 하고/꽃을 피웠습니다”라고 노래하여 연꽃의 탄생 과정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잎과 꽃을 피우니 그 위에 온갖 생물들이 약동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생동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수면 위에 그렇게 화려한 정경이 생동하지만 뿌리는 진흙 속에서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연잎과 줄기를 받치고 있다. 침묵 속에 자기 할 일만 수행하면서, 생명의 기쁨을 함께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진흙 속의 뿌리도 줄기, 잎, 꽃, 열매와 연결된 한 몸이라는 점을 시인은 의미 있게 밝힌다.

  「연뿌리 4」는 겨울의 상황이다. 겨울이 되면 줄기, 잎, 꽃, 연밥은 모두 사라지지만 뿌리는 진흙 바닥 속에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다시 새 줄기와 잎과 꽃을 피운다. 겨울을 견딘 뿌리가 없으면 봄, 여름, 가을의 풍성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 “감옥인 줄 안 진흙구덩이와 연못이/오히려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나를 먹이고 기르며 살리는/신의 품”임을 뿌리는 자각한다. 여기서 뿌리는 시인 자신이고, 그래서 이 발견은 경이롭다. 「연뿌리 2」에서 “꽉 조이는 진흙 감옥”이라고 비유했는데, 「연뿌리 4」에서는 “신의 품”으로 승화되었다. “투박하고 못 생긴 나를/언제나 꼭 껴안아주는/진구렁”과 “아무리 가물어도/나를 목마르지 않게/흠뻑 적셔주는/연못”이 사랑이고 축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성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모성의 사랑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3. 모성의 사랑

  앞에서 마늘의 시적 구성에 겨울을 이기고 뿌리를 내려 봄에 자신의 맵고 알찬 육 쪽 새끼들을 거느리고 싶다는 소망이 나타났음을 언급했다. 차옥혜 시인의 작품에는 바로 이러한 모성적 사랑, 희생을 통한 헌신, 베풂의 삶에 대한 지향이 육화된다. 예컨대 산비탈에 선 나무들에서 산비탈에 쓰러질 듯 간신히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하염없이 하늘이 그리워/손을 흔들고 있구나라고 그 안쓰러운 모습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 나무들의 애간장 탄/검은 몸통에서 자식들을 이끌고 절망의 터널을 건넌 부모님들을 떠올리며 인간의 상황을 연결한다. 사유의 초점이 부모님이 자식을 기르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늘 모성적 사랑과 희생적 헌신으로 귀결됨을 볼 수 있다

  직박구리를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연작은 직박구리가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기르다가 고양이의 먹이로 희생된 사연을 순차적으로 다룬 작품인데, 이 시에 부모의 자식 사랑이 알뜰하게 표현되어 있다. 첫 작품 「직박구리가 둥지를 치다」에서는 직박구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둥지를 엮는 과정을 묘사했다.

  직박구리 부부가
  거실 창 앞 땅으로 기운 소나무 밑가지
  흔들거리는 연약한 솔잎 위에 지붕 없는
  사랑의 집을 짓다
  솔잎 겹겹 쌓인
  평평하고 튼튼한 자리 두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천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골라
  쉴 새 없이 작은 나뭇가지, 짚 물어다
  겨우 배와 다리만 담을 수 있는
  작고 둥근 바구니 모양의
  둥지를 틀다
  한 달도 못 쓰고 떠날 집을
  태어날 새끼를 위하여
  신명이 나서 정성을 다하여
  복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이 아파도 날개 죽지가 결려도
  직박구리 부부가
  설레는 마음으로 두근대는 가슴으로
  보금자리를 만들다
                                         - 「직박구리가 둥지를 치다」 전문

  기운 소나무 가지 위에 연약한 솔잎으로 엮어 지붕도 없는 둥지지만 시인은 그것을 “사랑의 집”이라고 불렀다. “작고 둥근 바구니 모양의 둥지”가 완성된 것이다. 그 둥지는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 공간이니 “한 달도 못 쓰고 떠날 집”이지만 “태어날 새끼를 위하여/신명이 나서 정성을 다하여/복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입이 아파도 날개 죽지가 결려도” 모든 것을 인내하며 직박구리 부부는 “설레는 마음으로 두근대는 가슴으로” 보금자리를 만든 것이다. 본능에 해당하는 행위를 이렇게 정성껏 묘사한 데에는 시인의 모성적 사랑이 깃들어 있다. 모성적 지향이 있었기에 이러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가 나왔을 것이다. 

   「직박구리가 알을 품다」에는 직박구리 부부가 정성을 다해 알을 품어서 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전 과정이 사랑과 감사의 연속임을 나타냈다. 「직박구리 새끼들이 태어났다」는 알에서 나온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다정한 모습이 묘사된다. “벌레를 잡으면서도/천적들에/새끼들이 들킬까/둥지에 드나드는 자신들이 들어날까/조바심”하며 새끼를 키우는 과정을 정성을 다해 묘사했다. 무사히 자라 “새끼들이 훨훨 날아가기를/어미 새는 온몸으로 빌고 빌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미 새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새끼들을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어미 새들도 긴장하고 시인의 부부도 방어책을 마련해 주었지만 결국은 새끼들이 모두 고양이에게 잡혀 먹히고 “적막한 들녘엔 에미 직박구리 울음소리만 가득”하게 되었다. 약육강식의 세상을 한탄할 뿐 시인이 할 일은 없었다. 시인은 그 귀여웠던 새끼들과 어미들의 정성을 생각하며 목이 메어 흐느낄 뿐이다. 자연의 비정한 생리 앞에 시인은 허탈해 하며 “이게 자연의 섭리”인지 “모든 생존은 우연의 혜택”인지 괴로워한다. 시인의 모성적 자애심이 자연의 생리 앞에 무너져 내리는 체험을 생생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노래했다.

   「모란꽃이 피었다」에서는 모란꽃을 좋아하여 기르다 몇 번이나 실패한 사례를 얘기하면서 그가 모란꽃 재배에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란꽃밭 만들어/해마다 꽃씨를 받아/심고 심어 물주고 가꾸어/지나가는 사람들에게/모란꽃 아름다움 떼로 안겨주리/모란 씨도 나누어 주리”가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자신이 모란꽃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나누어주려고 행하는 것임을 말했다. 참깨를 터는 기쁨도 단순한 수확의 기쁨이 아니라 진통 끝에 아기를 얻은 “참깨의 어미”(「참깨가 쏟아진다 얼씨구」)가 된 기쁨이라고 말한다. 자연에서 어머니의 표상을 떠올린 것은 그의 시편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남색」에서 짙푸른 하늘을 어머니의 가슴과 손과 발이 얼비치는 모습이라고 했고, 봄날 쑥국을 먹으면서도 그 쑥국의 맛에서 “어머니의 밥상”(「쑥국을 먹으며」)을 연상한다. 「가을에 만난 꽃들이」에 나오는 90 세가 넘어도 시를 쓰는 시인, 110 세에도 읍내 시장을 다녀오시는 할머니도 사실은 모두 어머니의 표상이다. 그는 그러한 희생과 헌신의 모성으로 자신의 생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베풂과 사랑의 정신이 넘친다.  

4. 생태학적 사랑

  자연에 대한 모성적 사랑은 당연히 생태학적 사유로 시인을 이끈다. 시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생명을 사랑하기에 모든 시인은 생태학자이고 모든 시는 생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옥혜 시인은 추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인물을 끌어와서 생태학적 사유를 펼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애틀 추장과 그레타 툰베리다.

  1854년 초 시애틀 지역  
  수쿼미시 부족 추장이 
  원주민 땅을 수용하려는
  미국 연방정부 협상단에게

  “어떻게 하늘을 사고 팔 수 있으며  
  대지의 온기나 영양의 신속함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원주민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서
  신화가 될 때도 
  이곳 바닷가는
 
  한때 이곳에 살았고
  아름다운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여들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자꾸만 나를 치며 아프게 한다
                                               - 「」 전문

  생태학이란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1869년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에 의해서이고,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생태학은 생물과 생물,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개념이다. 동양의 사상은 예전부터 관계를 중시했다. 불교의 연기론이나 노장사상의 자연무위는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대등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룬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의 문학에는 모든 생명이 동일한 존재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생명과 자연계의 생명을 동일하게 보고 더 나아가 우주 만물을 똑같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상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와 인식이 동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인디언들도 세상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현상을 인디언 말로 ‘미타쿠예 오야신’이라고 불렀다. 위의 시에 인용된 시애틀 지역 수쿼미시 부족 추장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대지를 구성하는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며,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차옥혜 시인은 생태학적 사유의 정수로 들어가 땅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대지의 일부라는 관계 의식을 중시한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어떤 인물인지는 「행동하는 소녀 참 시인 그레타 툰베리」에 잘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로 2018년 9월에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 변화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여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시위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당신들 어른들이/미래에 침을 뱉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장면을 보고 시인은 자신을 반성하며 “나를 부끄럽고 아프게 하는/몸에서 절로 우러나온 명시를/시인 줄도 모르고 간절히 읊어대는/자신이 시인인 줄도 모르는 타고난 시인”이라고 했다. 모든 진정한 시인은 생태학자라는 말을 툰베리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툰베리는 미래의 희망을 위한 행동의 변화를 촉구했다. 시인은 그녀가 보인 행동의 의의를 “일단 행동하면 희망은 모든 곳에 퍼진다”로 요약했다. 핵심을 포착한 것이다. 그녀는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가면서도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보름 동안 태양광 요트로 대서양을 건너갔다. 자신의 신념을 몸으로 실천했으니 “몸으로 시를 쓰는 담대한 소녀”라고 시인은 호명했다.

  이러한 시인의 생태학적 사유는 몇 가지 자극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적 숙련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다. 그래서 시애틀 추장의 말이 가슴에 와 닿고 그레타 툰베리의 행동이 감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플라스틱에 죽은 향유고래에서 22kg이나 되는 플라스틱에 오염되어 죽은 고래의 몸을 보며 소리 없이 내지르는 절규를 듣는다. 이 모든 오염과 부패가 결국 나 때문에!/너 때문에!” 오게 된 것을 절감하여 느낌표로 사실을 강조했다. 낚싯줄에 걸린 가마우지에서는 낚시꾼들이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낚싯줄에 걸린 가마우지가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고래의 죽음이나 가마우지의 몸부림이 시인에게는 동등하게 인식된 것이다. 가마우지의 참상에서도 모성의 사랑을 떠올리며 고개 빼고 먹이를 기다리는/갓 태어난 새끼들이 어른거려/속이 타들어가/어서 가야지 어서 가야지/날아가려고 안간힘 쓰며버둥거린다고 표현했다. 어미와 어머니가 나를 울려도 모성애에 바탕을 둔 생태학적 상상력의 시다. 범고래가 죽은 새끼를 계속 입으로 밀어 올려 바다 위로 띄우는 장면을 보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나 고래나 다름이 없음을 노래했다. 우리가 종국에 기댈 것은 어머니의 사랑밖에 없다는 점을 주제로 내세운 것이다.

   「내 안에 누가 사나」는 독특한 상상력의 시인데, 이것은 쥐가오리 떼의 동영상을 보고 착상한 것이다. “오십 마리가 넘는 거대한 쥐가오리 떼가/바다에서 5미터 높이로 한꺼번에 뛰어” 오르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데, 그것은 놀이를 위해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적이나 기생충을 만나면 피하느라/바다 밖으로 빠져나오는/생존을 위한 급박한 몸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이 보기에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그 장면이 사실은 쥐가오리들이 죽을힘을 다해 뛰어오르는 생존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우리에게는 볼 만한 장관이지만 쥐가오리에게는 생사가 걸린 몸짓이다. 시인은 그 장관을 자꾸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뜻밖에도 “옛날 로마 민가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불구경을 하며 시를 썼다는/폭군 네로”의 심리에 비교한다. 생명 사랑의 치열한 자의식이 그러한 반성적 사유를 불러온 것이다. 시인은 반성적 자의식 속에 쥐가오리들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고 시를 끝맺었다. 자연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 사과할 줄도 아는 진정한 생태주의 시인임을 알 수 있다.

5. 지성의 사랑

  그의 관심은 자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애통해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적 태도를 갖기를 호소한다. 그는 생태의식을 실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사회의식을 실천하는 건전한 지성의 시인이다. 그리하여 견우와 직녀는 만나야 한다에서 분단 70년의 역사를 넘어서서 사람이 으뜸인 평화 통일의 나라를 이룰 것을 소망한다. 한반도 평화 통일 향해 노 젓는 뱃사공에서는 삼천리금수강산에서/평화 통일 즐기며 사는/복된 한겨레를 이상의 공간으로 호명한다. 진정한 독립과 애족의 정신을 실천한 김구 선생을 깊이 숭모하고, 기미독립운동의 장렬한 외침을 오늘에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단일팀 참가를 기리고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담긴 평화 통일의 염원을 찬미한다. 일본군 성노예 착취에 분노의 항변을 보내고, 2차대전 중 남태평양 작은 섬 타라와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살육전 속에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1200여 명이 희생되었음을 알아내고 그 무주고혼의 영령들을 추모하며 분통함에 몸부림치며 통곡한다. 이를 보면 그는 모성의 시인이자 생태 시인인 동시에 민족 현실에 눈감지 않는 참여 시인이다. 그가 참여 시인이라는 사실은 다음 시에 뚜렷이 드러난다.

  동백꽃이 활짝 피기도 전에
  칼바람에 눈밭에 떨어져 떨어져
  땅이 울고 있구나 하늘이 울고 있구나

  24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2인 1조로해야 할 일을 혼자서 밤새며
  화력발전소 석탄이송 설비 컴컴한 좁은 통로 오가며

  수많은 문을 일일이 열어
  몸을 반으로 접어 고개를 디밀고
  벨트에 끼인 석탄은 없나 살피며
  떨어진 석탄을 삽으로 퍼담다
  기계에 빨려들어 몸이 분리된 채 목숨을 잃었다

  그의 가방엔 라면 몇 개와 탄가루 묻은 물티슈
  취직되었다고 새 양복 모처럼 사 입고

  엄마 아빠 앞에서 희망에 차서
  폼 재며 애교 부리던 청년

  죽은 아들의 탄가루 묻은 검은 얼굴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아들이 위험한 곳에서 사람대접 못 받고
  한 낱 기계가 되어 일하는 줄 몰랐다고
  “위험의 외주화” 막아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고
  책임자 처벌을 할 때까지는
  아들의 장례식 치룰 수 없다고
  단식하는 어머니

  동백꽃이 활짝 피기도 전에  
  칼바람에 눈밭에 떨어져 떨어져
  땅이 울고 하늘도 울고 있는 곳
  여기는 어디인가
                                                    - 「여기는 어디인가」 전문

  이 시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두고 쓴 시다. 20181211일 새벽 320분경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휘감겨 머리가 절단된 끔찍한 시신이 발견되었다. 야간 근무하던 24세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시신으로 사고가 난 지 이미 4시간이 경과된 상태였다. 병든 남편을 돌보며 아들을 뒷바라지하던 어머니는 믿을 수 없는 참변에 넋을 잃었다가 눈물을 삼키고 힘없는 노동자들을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노동삼권도 모르고 산별노조도 모르던 그녀가 여러 단체와 연대하여 김용균재단을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여론이 조성되어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반인권적 용역 구조를 개선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시인은 노동자의 세계를 모르고 비명횡사한 젊은 노동자 김용균 어머니의 삶은 더욱 모른다. 그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지식인인 시인은 그들과 동질적 연대감을 갖기가 힘들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이것을 자본의 노예가 된 지식인 의식의 결과라고 했다. 인간 욕망이 최대로 작동하는 대한민국 시장경제 하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 온 시인이 계약직 노동자의 현실이나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마음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시인은 어떤 시를 쓸 수 있는가? 시인은 “내 아들의 안녕만 돌보고 산 나를/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어머니”(「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머니」)라고 탄식한다. 쥐가오리 떼의 수중 도약을 보고 재미있어 한 자신의 모습을 쥐가오리 떼에게 사과했듯이 시인은 자신의 의식 없음을 김용균의 어머니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이것은 노동자 권리 회복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의 문제다.

  차옥혜 시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의 사람다움을 최우선에 놓는 시인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의 동등한 관계가 주위에 전파되기를 염원하고, 생태학적 사유에 기반을 둔 자연 사랑이 사람들에게 확대되기를 소망한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평화 통일의 세상과 젊은이들이 위험 없고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평등 평화의 세상을 꿈꾼다. 차옥혜 시인이 이 시집에서 보여준 다양한 소망의 표현은 생명 사랑, 인간 사랑의 중심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시집은 모성적 사랑과 생태학적 사랑과 애국애족의 지성적 사랑이 종횡으로 엮인 다성적 향연(symposion)이다. 이 시집의 발간을 통해 시인의 다성적(多聲的) 사랑이 사회 전체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희망한다. 그와 동시에 차옥혜 시인의 시정신도 더욱 정갈한 사람 중심의 통일 세상을 향해 건실한 행보를 계속할 것이라고 믿는다. (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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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

시 -4 2020. 12. 7. 11:31

겨우살이

                                 차옥혜 

그늘이 싫어
하늘에서 살고 싶어
오르다 오르다 못 올라
참나무 우듬지에 뿌리내려
마냥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에 집 짓는 꿈을 꾸는 너
꿈에 물들어 겨우살이에도
푸르러 푸르러 아름다운 너  

지상의 헐벗은 목숨에게도
뿌리내릴 참나무 있어라
하늘에 꿈을 심어
싹 튼 꿈으로 연명하며
혹독한 겨우살이 이겨내어라 

                                  <문학의집·서울 29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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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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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십자가, 영원한 횃불

                                                   차옥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외치며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스물두 살 젊음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는
청계천의 십자가!
이 나라 노동자들을 지키고 일깨우는
영원한 횃불!

50여 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보조원으로 취직하여 재봉사가 된 전태일은
90퍼센트가 여성인 이만여명 노동자들 중에
40퍼센트인 13세에서 17세 어린 소녀 보조원들이
다락방 형광등 밑에서 하루 14시간
먼지를 들이마시며 일하다가
폐질환에 걸리는 게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백 볼트 전등 한 개를 더 켜달라고
신선한 바람이 흘러드는 창문 하나 달아달라고
일요일엔 쉬게 하고 정확한 건강진단을 해달라고
70원에서 100원인 일당으로는 기진맥진
배고파 죽겠으니 반절만 더 올려달라고
업주에게 하소연하고 노동청에 진정하며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도 묵묵부답 마이동풍
마침내 말썽꾸러기라고 공장에서 쫓겨났으나
가엾은 어린 노동자들 못 잊어 다시 돌아와
자신의 몸에 불을 지펴 어두운 세상을 밝힌
전태일 열사는
언제 어디서나 이 나라 노동자들 마음에
영원히 살아 힘과 용기를 주는
청계천의 십자가! 영원한 횃불!

 

        <푸른사상,  2020년 봄호  -전태일 열사 50주년 기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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