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친화의 서정시, 다시 살아날 호밀
최도선(시인)
차옥혜 시집 『호밀의 노래』
현대시학
TV를 켰더니 화면에 황금물결 일렁이는 들판으로 시뻘건 불길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그 뒤로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치솟는다. 그 광경을 보며 ‘저게 뭐지!’ 하고 있을 때 자막이 떴다. ‘우크라이나 호밀밭에 러시아군이 폭탄을 퍼부어 불바다를 이룸’ 나는 소스라쳤다. 오전에 읽은 차옥혜 시인의 시집 『호밀의 노래』가 불 속에서 타고 있는 듯했다. 우크라이나의 호밀 곡창지대를 불바다로 만들다니!
호밀은 내한성이 강해 겨울에 파종해서 새싹이 눈 밑에서 자라고 반대로 여름에는 엄청난 고온과 건조한 기후에도 끄떡없이 견디는 내구력을 지녔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러시아지역 중부유럽 동유럽에서 많이 생산되는 구세주와 같은 작물이다. 요즘 소울푸드인 호밀빵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다.
호밀을 소재로 한 시가 7편이나 들어 있는 차옥혜 시인의 14번째 시집 『호밀의 노래』는 생명 존중의 상징과 서정성의 백미다. 「가을 호밀 새싹」 「겨울 호밀」 「봄 호밀」 「사월 초 호밀 노래」 「이삭 맺은 호밀」 「풋거름이 된 호밀」 「오월 죽은 호밀밭 다시 살아나다」는 호밀의 사계(四季)를 노래한 시로 독특한 정서를 지녔으며 독자들을 새로운 힘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가을밭에 모처럼 호밀을 심었다. 호밀이 뿜어내는 강렬한 푸른 생명력은 내게 희망과 꿈을 꾸게 한다.” 즉 혹한, 혹서,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내는 호밀을 소재로 한 것은 차옥혜 시인의 의도된 창작으로 보인다. 삶의 견딤을 은근하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내고 싶은 시인의 절절한 목소리다. 코로나19와 기후재앙을 목도하며 회복의 염원을 노래로 풀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은 만만치 않아라
소슬바람 지나
찬바람 높바람 휘몰아쳐
땅은 꽁꽁 얼어
뿌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더니
폭설이 온몸 덮친다
벌써 죽어야 하는가
가을에 겨우 태어났는데
겁에 질려 눈 감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몸은 여전히 푸르다
여리고 가냘픈 잎이
어디서 힘 받는가
눈 감옥 여기저기
호밀들 있는 듯 없는 듯
미세한 푸른 핏줄로 서로서로 깨워
온기 나누며 지키고 있구나
혹독한 겨울을
함께 견디며 맞서 이기고 있구나
장하여라 우리 겨울 호밀밭
-「겨울 호밀」 전문
차옥혜 시인은 겨울 호밀의 첫머리를 “세상은 만만치 않아라”로 시작하여 “혹독한 겨울을/ 함께 견디며 맞서 이기고 있구나” 하고 탄식으로 끝맺지 않고 “장하여라 우리 겨울 호밀밭” 하며 승리의 감정으로 끝맺는다. 그 결구를 뒷받침하는 것은 앞 행에서 “눈 감옥 여기 저기/ 호밀들 있는 듯 없는 듯/ 미세한 푸른 핏줄로 서로서로 깨워/ 온기 나누며 지키고 있구나”라고 따뜻한 눈길로 주의 깊게 사물(호밀밭)을 관조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차옥혜 시인은 세상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섬세하고 진지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삶의 본질을 포착해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여 시를 빚는다. 더 나아가 자연에 아낌없이 숭고한 예의를 보낸다.
올곧은 눈길로 자연을 대하는 사람,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불러본다. 13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나온 이 시집은 자연에서만 머물지 않고 현재 있는 부조리한 사건들까지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노래하고 있다. 그 시들을 다 소개할 수 없어 그 시들을 보듬어 나온 대표하는 시 한 편 소개하고 시인이 염원한 대로 재난은 극복되고 평화롭고 건강한 새날이 회복하기를 기원하며 맺는다.
<문학과창작, 2022년 가을호, 좋은 시집 좋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