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꽃

시 -5 2023. 1. 7. 15:17

개망초꽃

                                           차옥혜

 

백일홍, 원추리, 참나리, 장미
수국, 접시꽃, 범부채, 우단동자
한창인 초여름 꽃밭 틈 사이 솟아 핀
개망초꽃!
뽑아내려 다가오는 호미든 손

안돼!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둬
내가 잡초꽃이라고? 보기 싫다고?
나도 하늘이 보내준 국화과에 속하는
노란 씨방을 품은 하얀 꽃이잖아
나 때문에 꽃밭 품위가 떨어진다고?

장애인 요양소가 이사 온다는 건물에
장애인들 이사 못 오게
제멋대로 폴리스라인을 치고
건물 옆에 천막 짓고 몰려 앉아
지키고 있는 건장한 주민들

 

                                          <시와문화,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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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시 -5 2022. 10. 27. 13:50

보고 싶다

                                               차옥혜

 

소녀적 이른 아침 다락방 창문을 열면
냇물 건너편 둑에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
서로 멀리서 바라만 봤어도
바람과 시냇물에 실어
소리 없이 주고받던
설레는 말들
학교에 늦을까 봐 곧 창문을 닫으며
꽃이 되던 나

그 소년은
아침 햇살이었을까
꿈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보고 싶다’
한마디만 쓰고는 못 부친 편지를 품고
구름 따라 발이 부르트도록 걷던 길

이제 하얀 머리칼 흩날리면서도
아직도 편지를 품고 떠도는 것은
‘보고 싶다’
단 한마디 말의 힘이리라

 

                                      <2021.2.20. 한국작가회의 시분과 사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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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역

시 -5 2022. 9. 11. 13:18

전주역

                                                         차옥혜

 

내 고향 전주역 승강장엔 언제나
대학 입학을 위해 처음 고향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젊은 어머니가 서 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척이는 마음 숨기고
의연한 척 웃고 있는 나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꽃샘바람에 옷고름과 치마폭을 펄럭이는
매화 같은 어머니
기차가 도착하자 재빨리 짐을
좌석 위 선반에 올려주고 내려가
차창 아래서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
마침내 기차가 아득히 사라져도
발길 못 돌리고 장승처럼 서 있는 어머니
어머니의 가슴에 출렁이던 소리 없는 말들
또렷이 들려와 나를 울리는
전주역 승강장엔
나를 보내면서 이내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늘 나의 지표로 서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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