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른 산등성이

                                                                    권 달 웅

아득히 먼 산등성이에
낮달이 걸렸다

벗어놓은 지게에
낫이 꽂혔다

희미한 낮달도 닳은 낫도
등이 휘어졌다

푸른 산등성이도 아버지도
등이 휘어졌다

낫은 창백하고
낮달은 애달프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산등성이는 가파르다

모두 등이 휘어지도록
무거운 짐을 졌다

가도가도 멀고 험준한
생의 비탈길

 

*** 눈물이 핑 돈다. 심금을 울리며 위로하는 시의 힘!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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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

시 -5 2023. 1. 7. 15:17

개망초꽃

                                           차옥혜

 

백일홍, 원추리, 참나리, 장미
수국, 접시꽃, 범부채, 우단동자
한창인 초여름 꽃밭 틈 사이 솟아 핀
개망초꽃!
뽑아내려 다가오는 호미든 손

안돼!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둬
내가 잡초꽃이라고? 보기 싫다고?
나도 하늘이 보내준 국화과에 속하는
노란 씨방을 품은 하얀 꽃이잖아
나 때문에 꽃밭 품위가 떨어진다고?

장애인 요양소가 이사 온다는 건물에
장애인들 이사 못 오게
제멋대로 폴리스라인을 치고
건물 옆에 천막 짓고 몰려 앉아
지키고 있는 건장한 주민들

 

                                          <시와문화,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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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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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시 -5 2022. 10. 27. 13:50

보고 싶다

                                               차옥혜

 

소녀적 이른 아침 다락방 창문을 열면
냇물 건너편 둑에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
서로 멀리서 바라만 봤어도
바람과 시냇물에 실어
소리 없이 주고받던
설레는 말들
학교에 늦을까 봐 곧 창문을 닫으며
꽃이 되던 나

그 소년은
아침 햇살이었을까
꿈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

‘보고 싶다’
한마디만 쓰고는 못 부친 편지를 품고
구름 따라 발이 부르트도록 걷던 길

이제 하얀 머리칼 흩날리면서도
아직도 편지를 품고 떠도는 것은
‘보고 싶다’
단 한마디 말의 힘이리라

 

                                      <2021.2.20. 한국작가회의 시분과 사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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