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살구나무

시 -3 2015. 7. 30. 15:00

 

억울한 살구나무

                                               차옥혜

 

 

살고 싶다 잘 살고 싶었다

가지마다 빈틈없이 화사한 꽃을 매달고

천지사방 벌들을 불러 모으고 싶었다

푸른 하늘에 무성한 잎을 드리워

새들의 노래자랑 무대가 되고

내 그늘에 모여 쉬는 사람들에게

잘 익은 열매를 떨어뜨려주고 싶었다

주인이 나를 자랑하며 기쁘기를 바랐다

 

나는 묘목으로 팔려온 새 뜰에서

꿈을 펼치려고 온 힘을 다하여 몸부림쳤다

그러나 늙은 감나무뿌리는 내 어린뿌리를

가로지르며 한사코 텃세를 부리고

잔디뿌리는 내 발을 칭칭 감고 옥죄었다

나무와 풀들이 몰려와 내 물을 빼앗아 마셨다

허덕이며 듬성듬성 꽃을 피우고 새싹을 내밀면

애벌레들이 잽싸게 갉아먹어버렸다

간신히 몇 개 열린 살구는 바람이 날려버렸다

 

주인은 나를

오래 기다렸으나 가망이 없다고

톱을 들고 다가선다

 

<문학과행동  2015년 여름 창간호>

 

'시 -3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로 가는 길은 왜 그리 먼가-마틴 루서 킹  (0) 2016.02.01
한글로 나는 사람  (0) 2016.01.31
감나무의 그리움  (0) 2015.06.04
숲 거울  (0) 2015.05.22
풍차와 나  (0) 2014.07.01
Posted by 차옥혜
,

감나무의 그리움

시 -3 2015. 6. 4. 08:39

 

감나무의 그리움

                                           차옥혜

 

 

새싹 내밀며 기다렸다

 

꽃피우며 꽃잎 흩날리며 기다렸다

 

잎새 반짝이며 기다렸다

 

열매 맺어 붉도록 기다렸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리움은 오지 않아

단풍잎 바람 길로 그리움 찾아 떠돌다

가랑잎 땅 길로 그리움 찾아 헤매다

바스라지고 으깨졌다

 

홍시 눈물 뚝뚝 떨어졌다

 

잊자 잊자 마음 다잡아도 끝내 못 잊어

빈 가지 가득 눈꽃 피워놓고 기다린다

 

<문학과창작  2015년 여름호>

'시 -3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글로 나는 사람  (0) 2016.01.31
억울한 살구나무  (0) 2015.07.30
숲 거울  (0) 2015.05.22
풍차와 나  (0) 2014.07.01
장님이 되라 하네  (0) 2013.12.24
Posted by 차옥혜
,

숲 거울

시 -3 2015. 5. 22. 22:20

 

숲 거울

                                                     차옥혜

 

 

숲에 들면

내가 보인다

앞만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인다

현실만 보이지 않고 과거도 미래도 보인다

현상만 보이지 않고 숨은 것도 보인다

죽은 목숨들의 영혼도 보인다

바위, 흙, 하늘, 구름, 바람, 계곡 물의

마음도 보인다

 

세상을 등지려고 숲 거울에 든 그 사람은

자신을 에워싼 수백 송이 달맞이꽃이

밤새워 꽃문을 여는 것을 보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숲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앞은 약한 짐승을 쫒는 맹수 이고

뒤는 벼락 맞은 나무인 것을 보고

아예 숲 거울에 자리를 펴고 도인이 되었다

 

나는 숲 거울에서 지금 무엇을 보는가

앞은 더덕이고 뒤는 나비인 나

뿌리와 날개가 대지와 하늘이 맞서

안개가 낀다

 

 <PEN문학  2015년 5,6월호>

 

'시 -3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억울한 살구나무  (0) 2015.07.30
감나무의 그리움  (0) 2015.06.04
풍차와 나  (0) 2014.07.01
장님이 되라 하네  (0) 2013.12.24
길에 나를 두고 떠나고  (0) 2013.04.15
Posted by 차옥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