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나를 두고 떠나고

                                            차옥혜

 

길을 가며

길에

나를 세우고

나를 두고 떠나고

지나온 길들이

두고 온 내가

꽃처럼 새싹처럼 흔들리며

나를 부르고

그립고 사무쳐도

되돌아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 없고

자꾸만 낯선 새 길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스쳐가면서

또다시

길에

나를 세우고

나를 두고 떠나고

 

<서시 28집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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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도미네

시 -3 2013. 4. 12. 09:06

    

바디스 도미네

                                                        차옥혜

 

세상은 거대한 눈꽃입니다

길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푸른 보리밭과 생수가 솟구치는 울창한 삼나무 숲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배고픈 조카들 때문에 또다시 빵조각을 훔쳐

교도소에 재수감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빵을 찾아 죽음일지도 모르는

눈 산을 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폭설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얼어 죽었습니다

가엾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눈꽃 속을 헤매다

죽어야 합니까

천년입니까 만년입니까

봄은 정녕 꿈꿀 수 없는 것입니까

햇살이 새싹의 볼을 어루만지는 벌판을

배고픈 이들을 위한 무료 빵가게를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생명이고 사랑이고 평화고 희망이고 영원인 당신이시여

세상을 덮어버린 눈꽃에 길을 내시며 오소서

눈꽃을 헤쳐 언 손들을 잡아끌어 언 몸을 품어주소서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시와 산문  2013년 봄호>

 

*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 라틴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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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시감과 까치의 결혼식

                                                              차옥혜

 

하늘이 높고 맑고 푸르른 날

홍시감과 까치가 결혼식을 올린다

해가 주례를 선다

들깨, 서리태, 벼, 늙은 호박, 배추, 무, 파, 갓……

국화, 만수국, 채송화, 벌개미취, 맨드라미, 참취……

소나무, 좀작살나무, 화살나무, 모과나무, 주목, 밤나무……

새, 멧돼지, 토끼, 고양이, 쥐, 개, 고라니, 다람쥐……

도라지 캐던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네

장가 못간 아들 시집갔다 못 살고 온 딸

들판을 꽉 채운 축하객들이 가슴 설레며

늙은 감나무 우듬지 신부 홍시감과 신랑 까치를 본다

신랑 까치가 터질듯 부푼 신부 홍시감 깊숙이

부리를 박고 입 맞추며 몸을 떤다

신부 홍시감의 바람 면사포가 출렁인다

새들이 축하합창을 한다

홍시감의 온 몸이 더욱 붉어진다

저런! 막 결혼식을 올린 신랑 까치가

벌써 다른 홍시감과 또 새장가를 든다

해는 망설임 없이 또 주례를 선다

들판 하객들이 소란해진다

 

<문학과 창작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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