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창작시집 호밀의 노래 현대시학사 2022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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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표지 서평 지금껏 우리가 차옥혜의 시를 논의하면서 주목하지 못하고 빠뜨린 대목이 있다. 그의 시가 가진 여리고 예민한 서정성, 그로부터 발현되는 퇴행 불가의 호소력이다. 거기에는 ‘꽃샘바람에 옷고름과 치마폭을 펄 럭이는 매화 같은 어머니’가 있고(「전주역」), 어린 시절 ‘아침 햇살이었을까, 꿈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를 되뇌이게 하는 소년도 있다(「보고 싶다」). 그처럼 숱한 그리움과 기다림, 아픔과 슬픔을 견디는 동안 ‘용 기를 주고 희망을 속삭이던 등대’처럼 그의 시는 늘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등대가 그립다」). 이 순정한 서정성은 연약해 보이지만 기실 가장 완강한 힘이다. 이러한 시적 진실과 더불어 소망 가운데서 세상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관점이 오늘의 차옥혜 시인을 추동했다. 그리고 그 힘은 앞으로의 그를 수발(秀拔)하고 존중받는 시인의 자리로 이끌어 갈 것이다.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시집 속으로 봄 호밀 차옥혜 봄이다 샛바람 분다 살았다 견뎌내었다 이겼다 가을에 눈떠 멋모르고 우쭐대다 폭설에 덮혀 얼음에 갇혀 죽음과 싸우며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 자만이 느끼는 환희의 깊이와 높이를 봄날에 싹터 꽃샘추위에 벌벌 떠는 새순이 매화, 산수유, 수선화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겨우내 떨며 움츠리고 얼면서도 끝내 푸른빛 잃지 않은 작은 몸이 신기하고 대견하며 자랑스러워 제 이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신나고 기쁘고 기뻐서 제 어여쁨 소리죽여 노래한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좋아 봄날의 특권 아니냐 스스로 다독이며 힘 모은다 봄볕이 보약이다 겨우내 못 자란 키가 으쓱으쓱 솟는다 하늘까지 가보자 꿈꾸자 희망 품자 주변을 둘러보니 호밀 친구들의 상기된 눈빛 부푼 가슴 겨울을 함께 이긴 호밀들이 봄바람에 남풍에 샛바람에 꽃바람에 모두 함께 춤춘다 야 야 야 봄이다 봄날이다 호밀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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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창작시집 말의 순례자
시문학사 2021년 1월
시집 표지 서평
멀고 아픈 영혼의 순례에의 동행
이근배(시인・대한민국예술원회장)
그렇다. 시는 무엇이며 시인은 무엇인가의 물음 앞에 차옥혜 시인은 이 사화집 「말의 순례자」로 명료하게 답을 내놓고 있다. 시는 곧 “말의 순례”이고 시인은 “말의 순례자”라고,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시인은 날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서 떠난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일 수도 있고 만년설이 쌓인 가파른 등반일 수도 있다. 아니 천체망원경도 찾아내지 못하는 우주속의 별일 수도 있다. “광활한 말의 우주에서 별들의 근원과 신비를 찾아가는” 멀고 오랜 그리고 아픈 영혼의 피를 흘리는 시를 만나고 시인을 만나는 기쁨은 나만의 것일 수 없다. 이 아름다운 동행에 오늘 갇혀있는 길손들과 함께 나서고 싶다.
작품세계
… 차옥혜 시인은 언어에 대한 헌신적 자세, 자연을 통한 내면의 표현, 이 두 측면에서 시의 본질 탐구에 주력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 시인은 시월의 환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있다. 그는 햇빛이 자신과 길을 함께 껴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자연이 인간과 길을 구분하지 앟고 평등하게 수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평등한 수용의 결과 길에서 햇빛이 반짝이듯이 내 몸에서도 햇빛이 반짝이게 된다. 햇빛 속에서 길과 내가 평등하게 반짝이는 물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 차옥혜 시인의 작품에는 바로 이러한 모성적 사랑, 희생을 통한 헌신, 베풂의 삶에 대한 지향이 육화된다. … 사유의 초점이 부모님이 자식을 기르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늘 모성적 사랑과 희생적 헌신으로 귀결됨을 볼 수 있다.
… 자연에 대한 모성적 사랑은 당연히 생태학적 사유로 시인을 이끈다. 시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생명을 사랑하기에 모든 시인은 생태학자이고 모든 시는 생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옥혜 시인은 추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인물을 끌어와서 생태학적 사유를 펼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애틀 추장과 그레타 툰베리다.
… 그의 관심은 자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애통해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적 태도를 갖기를 호소한다. 그는 생태의식을 실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사회의식을 실천하는 건전한 지성의 시인이다.
… 이 시집은 모성적 사랑과 생태학적 사랑과 애국애족의 지성적 사랑이 종횡으로 엮인 다성적 향연(symposion)이다. 이 시집의 발간을 통해 시인의 다성적(多聲的) 사랑이 사회 전체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희망한다. …
-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의 시집 해설 중에서
시집 속으로
【13번째 시집 여는 시】
나는 말의 순례자
차옥혜
말의 종족으로 태어난 행운으로
귀가 열리자마자 말 세례를 받아
말로 나는 자라고 세계를 얻었다
말로 천 년 전후 사람도 만나고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산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말은 참 말의 일부
높고 깊으며 광활한 말의 우주에서
빛나는 별들의 근원과 신비를 찾아가는
나는 말의 순례자
말의 어머니를 만나면
생 노 병 사를 뛰어넘는
비밀 통로를 보리라
그러나 내 걸음은 점점 더 더디어가
끝내 말의 고향에 이르지 못해도
나는 진실, 생명, 평화, 사랑이 담긴
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산
말의 힘을 믿고 의지하며 산
끝끝내 말의 순례자임을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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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창작시집 씨앗의 노래
푸른사상 2019년 9월
도서 소개
어머니의 마음으로, 농부의 마음으로 쓴 생명의 시
차옥혜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씨앗의 노래』가 <푸른사상 시선 107>로 출간되었다. 씨를 뿌려 생명을 기르는 농부처럼, 시인은 따뜻하고 섬세하고 단단한 언어에 대지와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 씨앗이 속삭이는 희망과 치유의 노래를 들려준다.
추천의 글
차옥혜 시인의 시(노래)는 꽃이 피고 새가 나는…… 곡식과 채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자라는 흙빛도 고운 밭자락에 앉아서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농부들의 손에 의해서 혹은 스스로 몸을 가꾸듯이 알알이 여물어가는 지상의 작고 아름다운 열매들…… 그것들의 빛깔과 향기와 의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고요한, 적막한 자연의 시편들! 형체를 지니거나 숨 쉬는 것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다가서는 그의 로고스(말, 언어) 는…… 두 손을 모으게 하는 기도문처럼 그리운 음성과 생에 대한 경건주의로 아련하게 읽혀진다. 그의 시는 생명과 평화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만가만 젖어와 오늘을 노크, 사랑함의 문을 열어준다.
— 김준태 (시인)
흙을 밟고 살아가는 시인은 안개 낀 가을 아침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꽃이 피고 과일이 익고 곡식이 여물고 짐승들이 젖은 잎새를 헤치며 먹이를 찾는 것을 바라본다. 여름바람이 세상을 초록빛으로 물들이려고 쉴 새 없이 씨를 뿌리는 것도 바라본다. 가뭄과 장마와 폭풍을 이긴 들깨와 호두와 감과 은행과 고구마와 방울토마토 앞에서는 두 손을 모은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상을 밝히다가 먼 길 떠나는 꽃이며, 나무와 산새와 산짐승을 지키는 산지기며, 암투병하는 몸으로 한여름 뙤약볕에서 밭을 매는 이웃을 품는다. 배추꽃 무꽃 부추꽃으로 피고 시냇물로 바람으로 세계를 닦다가 “마침내 내 별자리로 돌아가면/밤마다 못 잊을 지구별/사람, 집, 마을, 들, 산천/어루만지는/별이 되리”(「별의 꿈」)라는 노래도 가슴 깊이 부른다.
— 맹문재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작품 세계
자연에서 서정을 발견하는 우리의 현대시 독법은 오랫동안 편향되어왔다. 생명의 순환과 지속성은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불러오는 혁명적인 자리이기도 한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통 서정시에서는 변혁의 힘을 제거하거나 은폐한 채 인간사에 대한 유비로 자연을 읽어내거나 생명을 찬양하거나 신비화하는 데 치우쳐 있었던 것도 같다. 차옥혜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이 시집이 그리고 있는 자연 서정의 힘은 씨앗의 생명력이 지닌 아름다움과 온기에도 있지만, 그것이 지닌 변혁의 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데도 있었다. 자연의 위의와 아름다움에 감탄의 눈길을 주면서도 이 시집이 생활 현실의 고단함과 신산함을 놓치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차옥혜의 시는 신동엽의 시가 지니고 있었던 대지의 생명력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계승하고 있는 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씨앗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만한 이번 시집에서 차옥혜의 시는 따뜻하고 섬세하고 단단한 언어로 치유의 노래를 들려준다. 찬란한 생명을 틔울 씨앗처럼 목숨을 살리는 시를 쓰고자 하므로 차옥혜는 어머니의 마음이자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쓴다. 씨를 뿌리고 생명을 기르는 마음으로 존엄한 생명에 경이로운 눈길을 주며 공들여 쓰는 차옥혜의 시를 읽다 보면 서정시가 지닌 가능성을 문득 믿고 싶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숙주를 찾아 식탁을 차려대는 세상에서/지금 살아 반짝이고 있는 당신은.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존재”인지, “평생 생명의 존엄을 지킨 당신은/얼마나 복된 삶”(「살아 반짝이는 당신은 경이로운 존재」)인지 아는 시인은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을 묶었을 것이다. 「지진이 났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생명과 자연 생태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은 때론 지진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차옥혜의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시는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다. 온갖 꽃과 나무와 풀 이름이 등장하는 차옥혜의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읽으면 조수초목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시의 효용성을 제자들에게 역설했던 공자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차옥혜의 시는 꽃 이름, 나무 이름, 풀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이 적지 않음을 일러준다.
(중략)
이번 시집의 핵심어인 ‘씨앗’은 생명이고 목숨이고 넋이며, 아버지고 어머니고 나고 자식이다. 차옥혜의 시가 쓰고 싶어하는 시는 바로 그런 씨앗의 노래이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지킨 생명이자 목숨이자 넋인 노래. 그것은 씨를 뿌려 생명을 기르는 농부의 마음이자 시인의 마음이겠다.
(중략)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어느 시집이든 찾아오면/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으며/노트에 감동한 시 구절 기록하고/모르는 시어 일일이 사전에서 찾아 쓴 후/백지에 가장 자신을 울린 시 한 편/펜으로 꾹꾹 눌러 쓴 후/여백에 빼곡히 감동한 시/제목과 쪽 번호 나열하고 시평을 써서/폐지를 접어 만든 편지봉투에 넣어/시집 저자에게 보내주는”(「나비 시인」) ‘나비 시인’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옥혜의 시가 부르는 씨앗의 노래에 그렇게 화답할 아름다운 독자가 저기, 온다.
― 이경수 (문학평론가, 중앙대 국문학 교수) 해설 중에서
시집 속으로
씨앗의 노래
그 해 겨울
기근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전쟁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은 영희는
시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을 위해
간신이 묽은 죽을 쑤어 밥상을 차렸다
시아버지는 단식으로 속병을 고친다며
식사를 거부하고 물만 마셨다
영희가 매일 수시로 아무리 죽을 권해도
시아버지는 한사코 막무가내였다
봄이 오자 뼈만 남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신을 염하고 시아버지의 요를 거두니
씨앗들이 깔려있었다
볍씨, 콩, 상추, 아욱, 무, 배추, 조……
장례를 마치고 자식들과 고향을 떠나려던
영희는 통곡하며 씨앗을 끌어안았다
생명을, 희망을, 미래를 껴안았다
아버지 저도
사람 씨앗을 위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곡식 씨앗을 지키겠습니다
아버지가 목숨으로 지킨 씨앗
아버지의 몸이고 넋인 씨앗
아버지와 나와 자식이 씨앗으로
한 몸입니다
조상과 후손과 나는 씨앗으로
함께 영원합니다
영희는 죽을힘을 다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걸핏하면 울던 울보 영희는
그 이후 절대 울지 않았다
씨앗이 밀고 가는 세상
씨앗이 먹이는 세상
씨앗이 키우는 세상
씨앗은 생명이다 목숨이다 넋이다
씨앗은 아버지다 어머니다 나다 자식이다
초록 벌판에
종일 일하며 부르는 영희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렸다
시
깊고 먼 그 이름이다
바람 바람꽃이다
발아래 있는 하늘이다
아름다운 독이다
날마다 되돌아가는 고향이다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하늘이다
숲 거울이다
만날 수 없는 희망이다
희망이 부루는 소리다
눈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