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세상이 환하다 

                                                                차옥혜

 

 

친구 영숙이는 나이 50이 넘어 간호사 자격증을 따고

좋은 수입을 올리던 외과의사 남편과 함께

사택으로 10여 평 아파트와

두 사람 합쳐 월급 100$을 받기로 하고

카자흐스탄 알마타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봉사길을 떠났다.

 

알마타이 대 평원엔 긴 겨울 내내 눈이 덮이고

시내엔 오전 내내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나무마다 얼음꽃이 피고

집 없는 사람들이

동상 걸린 발을 질질 끌며 서성거린다고

치료받으러 온 동상 환자의 양말이

발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어 살과 함께 도려냈다고

환자들 몸에서 이가 뚝뚝 떨어지고

어떤 환자의 몸은 일부가 썩어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상처 냄새가 분뇨 냄새보다 심했다고

어떤 환자들은 약을 주면 팔아 빵을 산다고

의료봉사 틈틈이 야채를 길러 팔아

병원 재정에 보태야 한다고

편지지가 없어 인쇄용지 뒤에 써 보낸

영숙이의  편지

 

캄캄한 먼 나라 등대지기 영숙이 부부

 

<시와시학  200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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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싹 트다

시 -2 2008. 4. 1. 09:00

 

허공에서 싹 트다

                                                     차옥혜

 

여름 가을 겨울

처마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던

마늘이

허공에서 싹 트다

 

파릇파릇 마늘 싹이

허공에서

초록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구경한다

 

쪼글쪼글한 마늘이

말라비틀어지는 마늘이

제 몸의 수분을 한 방울이라도 더 짜서

새싹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올리려고

몸부림친다

 

마늘 싹이

허공을 깬다

 

<문학과창작  200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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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구이 새우

시 -2 2008. 1. 25. 09:38

 

소금구이 새우

                                                                  차옥혜

 

 

숯불 화로 위

소금을 깐 유리 뚜껑 냄비에서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새우

 

조개구이 상점에서

숯불을 피워 나르는 일을 하는 강씨는

청상과부로 품 팔아 자신을 키우다 골병든

늙은 어머니 병원비로 사채 330만원 빌려

6 개월 만에 또 다른 사채업자에게 빌려

이자 합쳐  610만 원 갚고

딸이 가난을 못 이겨 달아난 엄마를 찾아다니다

돌부리에 넘어져 부러진 이빨 때문에

70만원 빌려 20일 만에 이자 합쳐 140만원

또 빚 얻어 갚고……

아무리 발버둥이 쳐도

자꾸만 불어나는 빚더미와 생활비에 눌려

숨 가쁜 강씨는

손님 식탁 숯불 화로 위 소금밭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르는 새우를 보며

도대체 나를 누가 소금구이하고 있지?

소리 없이 말한다

 

<시문학  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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