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차옥혜

 

 

황토밭 원고지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야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후에도 보살피지 않으면

제 멋대로거나 사라지지만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이다.

언제나 설레고 아름답고 편안한

숨 쉬는 생명시이다.

옷은 황토물과 풀물로 얼룩지고

호미 들고 동동거려 팔다리가 쑤셔

볼품없이 늙고 여위어도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것이 즐겁다.

 

어느 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 지 어언 20년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지금 내 몸과 영혼의 집이 어여쁘다

 

 <문학의집서울  2007년 6월호>

 

'시 -2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금구이 새우  (0) 2008.01.25
가을엔 소리가 투명하다  (1) 2007.09.11
새와 유리창  (1) 2007.06.04
말의 마법  (0) 2007.06.02
삼월에 내리는 눈  (0) 2007.06.01
Posted by 차옥혜
,

새와 유리창

시 -2 2007. 6. 4. 09:44

 

   새와 유리창

                                                     차옥혜

 

 

새 한 마리 빠르게 날아와

거실 큰 유리창에 부딪쳐

순간 땅에 떨어져 죽었다

 

오라, 오라! 손짓한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을 향해

기쁨으로 전 속력을 다해 질주했는데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고 선

보이지 않는 유리창

유리창에 반사 된 허상의 유혹에

목숨을 잃어버린 새

 

죽은 새 위로

유리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날아가는

또 한 마리의 새

저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

갑자기 나는 더듬대고 머뭇거린다 

 

 

<정신과표현  2006년 1112월호>

<좋은 시 2007(삶과꿈재수록>

 

'시 -2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엔 소리가 투명하다  (1) 2007.09.11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1) 2007.07.02
말의 마법  (0) 2007.06.02
삼월에 내리는 눈  (0) 2007.06.01
낯선 방과 나그네  (0) 2007.03.23
Posted by 차옥혜
,

말의 마법

시 -2 2007. 6. 2. 15:05

  

말의 마법

                                                                      차옥혜

 

 

달구지풀, 작두콩, 병풍나물, 삿갓나물

요강나물, 족두리풀, 비녀골풀, 투구꽃, 갈퀴나물

 

이런 이름들 가만히 불러보면

 

가난해도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시골 할머니네 마을 사람들이 보이네

 

갯패랭이꽃, 구름패랭이꽃, 난장이패랭이꽃

섬패랭이꽃, 각시패랭이꽃, 술패랭이꽃, 수염패랭이꽃

 

패랭이꽃들 이름을 불러보면

 

장대비 쏟아져, 폭풍 휘몰아쳐, 천둥 번개 쳐, 폭설 내려

삼천리 방방곡곡 억울하게 죽은 목숨들 떠오르네

 

쑥, 씀바귀, 냉이, 달래, 두릅, 원추리 불러보면

 

몸에 생기가 돌고

산수유, 매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불러보면

겨울 창도 환하고 따뜻해지네

 

어쩌다 묵은 책갈피 속에서 떨어진

첫 사랑 편지를 읽으면

아득한 옛날이 지금인 듯 늙은 가슴도 설레고

돋보기안경 낀 얼굴도 화끈거리며 웃음꽃 피네

 

<문학과 창작  2007년 여름호>

 

'시 -2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1) 2007.07.02
새와 유리창  (1) 2007.06.04
삼월에 내리는 눈  (0) 2007.06.01
낯선 방과 나그네  (0) 2007.03.23
사막에게  (1) 2006.12.04
Posted by 차옥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