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감상】 시인은 해변에서 힌 거품을 내며 밀려오는 파도를 수만 말이 뛰어오는 모습으로 보고 있다.동시에 그 말들은 세계로부터 시인에게로 쏟아져오는 언어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 속에서도 말 한 마리 튀어나와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말은 짐승 말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가슴 속에 깃든 영혼의 부르짖음!  시인의 말인 것이다.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인의 내면과 풍경이 하나로 통합되어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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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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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시 -2 2009. 1. 5. 11:32

 

   사랑법

                                           차옥혜

 

온전한 너를 만나기 위해선

네가 뒤집어쓴 호두 껍질을

알맞게 균열을 내어 벗겨내야 한다.

너무 세게 힘을 주면

너는 바스러지고

힘을 조금 주면

너는 껍질을 벗지 못하고

상처만 입는다.

껍질을 쓴 너를 붙잡고

너에게 하늘을 열어줄

가장 적절한 힘을 찾는

내 손에 쥐가 난다.

 

<시문학  2008년 12월호> 

 <2009 좋은 시(삶과 꿈)  2009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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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자궁이 지은 집 

                                                          차옥혜

 

어머니는 주춧돌 아버지는 대들보

형제들은 주춧돌과 대들보를 이어준

일곱 기둥

별, 구름, 비, 바람, 눈, 해 놀다가도

틈 하나 나지 않고 튼튼하던 집

내 눈이고 귀이고 입이고 가슴이던 집

언제부턴가 일곱 기둥 차례로

새가 되어 날아가 버려 무너진 집

풀꽃과 달빛에 기대어

천리 밖 자식들 발자국 소리에

귀를 모으고 마음 졸이던

주춧돌과 대들보마저 묻혀버려

70년 만에 사라져버린 집

날마다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내 피와 살과 뼈인 집

내 길이고 등대인 집

날이 갈수록 더욱 환하고 아리는

가도 가도 닿지 않는 눈물 집

 

엄마아! 아빠아! 언니이! 오빠아! 동생들아!

숨바꼭질 그만하자  어서 나와

 

          <사철푸른어머니의 텃밭(한국시인협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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