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시 -1 2006. 5. 5. 15:46

  

 분신

                                                    차옥혜

 

님이여

내 애간장 다 태웠어도

길 어두워 못 오신다니

남은 살과 뼈마저 불질러

천 년을 순간으로 사는

불꽃이 됩니다

불꽃이 눈부신 길로

봄바람처럼 오소서

마침내 꽃잎 지듯

내 살과 뼈 재가 되어

님이 밟을 땅

웅덩이를 메우며 스러져도

이 세상 끝날에도 타고 있을

내 불꽃 넋은

님 속에 집을 지으리니

님이여

눈 짓무른 나는

당신을 향하여

지금 황홀한

불꽃이 됩니다.

 

<한국문학  198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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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

                                                       차옥혜

 

고통스러워도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음을

감사하겠습니다.

어두운 소리들이 허우적이는 시궁창에

내 귀도 빠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함께 썩고 썩어

발효하여

가스로 훨훨 날아가

하늘이 되게 하소서

괴로워도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

 

<심상  198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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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벗으니 다 보이는구나

                                                           차옥혜

 

모두 훨훨 벗어버려

다 보이는 겨울 숲이여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낱낱의 작고 가냘픈 어린 나무들이

드러나고

땅에 엎딘 마른 풀들도

환하구나

큰 나무들은

아득한 어린 나무들 앞에서

겸손하구나

이제 보인다

가려 보이지 않던

앞마을과 뒷마을

먼 산과 강과 지평선

그리고 길들이

환히 보이는구나

다 보이니

눈보라에 크고 작은 나무들

하나로 당당하구나

길 앞에서 모두가 한 목숨으로 장엄하고 아름답구나

모두 벗어

한 몸 된 겨울 숲이여

모두 벗어

내일인 겨울 숲이여

 

<심상  198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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