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차옥혜
입추와 처서와 백로를 지나
한로와 상강과 입동을 향해
그녀가 가고 있다.
벼와 사과와 감의 눈을 드려다 보며
갈대와 쑥부쟁이와 들국화의 가슴을 열어보며
귀뚜라미와 참새와 고라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과 땅과 강물의 숨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 모두가 여기까지 오기 위하여
괴롭고 괴롭고 아프고 아팠음을 알고
쓰라리고 화나던 미움도 죽음 같던 시간도
생애였음을 받아들인다.
문득 철없이 보내버린
입춘과 청명과 단오로 돌아가
참으로 아름다운 꽃만을 피우고 싶어져
진실로 어여쁜 잎새만을 키우고 싶어져
높은 산 높은 나무 우듬지에서 발을 돋아
오던 길 되돌아보며
나뭇잎에 피를 쏟는다.
끝내는 소설을 지나 동지섣달 그믐밤
얼음 산 잠의 집에 갇히겠지만
오늘의 자신이
떠난 생명의 썩은 힘으로 태어났듯이
올 목숨의 거름인 것 믿으며
단풍든 몸으로
단풍든 것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지금 살아 떠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다
속삭인다.
<시와생명 2001년 겨울호>
Posted by 차옥혜
존재는 슬프다
차옥혜
아침 숲을 헤매다 보니
막 싹이 난 어린 소나무가 울고 있다
다람쥐에 챘을까
도토리에 맞았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슬퍼 울듯이
자신의 존재가 슬퍼서 울고 있다
이 어린것도 벌써 존재의 슬픔을
본능으로 알고 있다
숲을 휘둘러보니
늙은 소나무도 전나무도 느티나무도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잘 생긴 바위조차 울고 있다
존재들은 울어 눈물에 무지개를 피우는가
울어 나무들은 자라고 숲은 아름다워지는가
울음이 키우는 생애
울음이 밀고 가는 세상
<경희문학 16집 2002년>
Posted by 차옥혜
상처의 힘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차옥혜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그 옛 성에서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레닌이, 혁명군들이
머물다 갔을지도 모르는
눈부신 자작나무를 만났다.
몇 백 살일까. 몇 천 살일까.
두 아름드리 몸통과 쭉쭉 뻗은 하얀 가지들이
빛을 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이 세상 삶들이
상처의 힘 없이도 빛날 수 있을까.
상처의 힘 없이도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 상처는 언제쯤
아물어 빛을 발할까.
자작나무를 껴안자
자작나무가 내 몸으로 들어왔다.
슬픔으로 꽉 닫혔던 내 마음의 창들이 열리고
내 마음의 자작나무가 세계를 향해
새를 날렸다.
<시와시학 2001년 가을호>
Posted by 차옥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