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

시 -2 2006. 5. 17. 19:31

 

등대지기

                                                                                 차옥혜

 

 

칠흑의 바다에 불덩어리 등댓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들이 항구들이

등대지기의 쓸쓸함과 고통과 사랑에

심지를 대고 타는

등댓불로 어둠을 이겼을까

등댓불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

등댓불로 여기까지 온 세계

 

등대지기의 아픔이 내 아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슬픔이 내 슬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눈물이 내 눈물을 사르고 

 

등댓불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어두운 등대지기여

내 밤바다 등댓불을 끄십시오

나도 어두워져

당신의 어둠과 하나 되어

당신의 밤바다 등대지기가 되겠습니다

 

당신의 밤바다에 내가 등댓불을 지피고

내 밤바다에 당신이 등댓불을 지피면

당신과 나에게 밤은 없으리

세상에 어둠은 없으리

 

<시와사람  200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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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

시 -2 2006. 5. 16. 23:26

 

가을바람

                                                            차옥혜

 

 

입추와 처서와 백로를 지나

한로와 상강과 입동을 향해

그녀가 가고 있다.

 

벼와 사과와 감의 눈을 드려다 보며

갈대와 쑥부쟁이와 들국화의 가슴을 열어보며

귀뚜라미와 참새와 고라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과 땅과 강물의 숨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 모두가 여기까지 오기 위하여

괴롭고 괴롭고 아프고 아팠음을 알고

쓰라리고 화나던 미움도 죽음 같던 시간도

생애였음을 받아들인다.

 

문득 철없이 보내버린

입춘과 청명과 단오로 돌아가

참으로 아름다운 꽃만을 피우고 싶어져

진실로 어여쁜 잎새만을 키우고 싶어져

높은 산 높은 나무 우듬지에서 발을 돋아

오던 길 되돌아보며

나뭇잎에 피를 쏟는다.

 

끝내는 소설을 지나 동지섣달 그믐밤

얼음 산 잠의 집에 갇히겠지만

오늘의 자신이

떠난 생명의 썩은 힘으로 태어났듯이

올 목숨의 거름인 것 믿으며

단풍든 몸으로

단풍든 것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지금 살아 떠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다

속삭인다.

 

<시와생명  200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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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슬프다

시 -2 2006. 5. 5. 22:43

 

존재는 슬프다

                                                         차옥혜

 

 

아침 숲을 헤매다 보니

막 싹이 난 어린 소나무가 울고 있다

다람쥐에 챘을까

도토리에 맞았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슬퍼 울듯이

자신의 존재가 슬퍼서 울고 있다

이 어린것도 벌써 존재의 슬픔을

본능으로 알고 있다

숲을 휘둘러보니

늙은 소나무도 전나무도 느티나무도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잘 생긴 바위조차 울고 있다

존재들은 울어 눈물에 무지개를 피우는가

울어 나무들은 자라고 숲은 아름다워지는가 

 

울음이 키우는 생애

울음이 밀고 가는 세상

 

<경희문학 16집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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