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시며 길을 가시는 아버지

                                                              차옥혜

 

 

자주 홍수가 나던 황야

길 없는 벌판에 길을 내시며

헤매는 이들의 손목을 잡고

길을 가시는 아버지

 

삶의 굽이굽이 가시밭 길목마다

아버지의 상처에서 피어난 꽃들이

내 넋을 깨우고

나를 향기롭게 하고

내 마음을 열어

뒤 뜰 풀 한 포기의 한숨소리를

바위 틈 다람쥐의 흐느낌을

듣게 하며

발아래 있는 하늘도 보게 하여

내가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게 합니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마른 나무들의 뿌리를 적시는

아버지의 강물이

가문 내 마음 밭에

완두콩도 열리고

감자 꽃도 들깨 꽃도 피게 합니다.

 

언제나 아침이신 아버지

저녁에도 아침같이

세상을 살라 하십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모래바람 속을 헤매는 철부지 탕아지만

아버지께서 언제나 대문에 켜놓으신

초롱불빛 보고

동서남북 방향을 헤아립니다.

 

오늘도 길 없는 황야에 길을 내시며

길을 가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길은 내 가슴 벌판에 환하고

끝내는 나도 가야 할 길입니다.

 

백발이 나부껴도

오늘도 정정한 걸음으로

길 없는 벌판에 길을 내시며

길을 가시는 아버지.

 

<시선집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하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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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시 -3 2016. 12. 25. 17:24

 

착한 사마리아인

                                               차옥혜

 

 

프랑스 아를에 있는 고흐가 살던 집

대문 안 본채로 가는 길 오른쪽 담벼락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고흐의 그림

<착한 사마리아인>

 

나의 아버지는

평생 “착한 사마리아인” 운동을 하셨고

“착한 사마리아인”을 내게 유산으로 남겼으나

그 유지 받들지 못하고 사는 나를

이역만리에서 뜻밖에 순간 내려치는 고흐의 그림

 

“착한 사마리안”이 그리워서

“착한 사마리안”이 되고 싶어서

“착한 사마리안”이 어려워서

한없이 길을 가며 울던 소녀 시절 나는

어디로 갔는가

 

늙고 눈물 마른 나는 옛길로 되돌아가

눈물 머금은 그 눈동자를 찾아야겠다

 

<시와 문화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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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기나무 불꽃을 본 모세들

                                                         차옥혜

 

 

떨기나무 불꽃을 본 사람이

이스라엘인 모세뿐이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에 신발을 벗고

에집트에서 억압받는 동족을 구해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은 이가

이스라엘인 모세뿐이랴

힘 없어요 두려워요 말주변 없어요

그냥 양이나 치고 귀막고 눈감고 살고 싶어요

겁나고 도망가고 피하고 싶어 하소연하다

어느덧 가슴에 옮겨 붙은 떨기나무 불꽃 때문에

고통하는 동족을 자유의 땅으로 탈출시킨 이가

이스라엘인 모세뿐이랴

 

세계가 열린 이래

어둠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떨기나무 불꽃을 본 모세들이

위로와 빛을 주었으니

 

헬조선에서 떨기나무 불꽃을 본

모세들의 대 행진에

농부 할아버지 모세 한 분

쌀값 폭락 농민들의 어려움 호소하고

젊은 모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려다

공권력의 정조준 물대포에 쓰러져

뇌출혈로 의식 잃어 뇌수술 받고

300여일이나 사투하다 영면했는데

사망진단서에 외인사를 병사라고 적은

대한민국 최고 병원 뇌신경외과 과장 의사

사고 이후 사과 한 마디 없이 수사도 않던

공권력이 부검을 하겠다니

농부 할아버지 모세의 시신을 지키려 모여든

1000여명의 시민 모세들

 

사망진단서가 배운 것과 틀리다고

스승들에게 길을 묻는 공개 펀지를 낸

의과대학생 모세들

 

사망진단서가 의료 원칙에 어긋난다고

공개 성명을 낸 의사 모세들

 

가족과 협의 없는 부검은 위법이라고

성명을 낸 변호사 모세들

 

떨기나무 불꽃을 본 모세들 있어

마침내 마침내 헬조선에 해가 뜨리

외인사 농부 할아버지 모세

고이 영면하고 다시 살아 영원히

떨기나무 불꽃 되리

 

억울한 사람들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꽃이 될 때까지

떨기나무 불꽃은

세상 곳곳에서

모세를 부르고 또 부르리

 

<경희문학 30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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