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시증에 걸린 지구

                                                           차옥혜

 

 

지구의 눈에서 불빛이 번쩍거린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불빛에

무수히 많은 나뭇잎과 나비의 날개

데이고 타버린 것은

 

지금은 지구의 눈 한쪽 이스라엘과 레바논 상공에서

불빛이 번쩍거린다.

지구의 평화가 지구의 눈 속 유리체가

자꾸만 떨어져나가

마침내 지구의 망막이 벗겨져버리면

지구는 장님이 된다는데 암흑이 된다는데

 

검은 파리나 지푸라기나 점들로

허공을 떠도는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은 유령들

비문증 날로 더 심해지는 눈을

좌우로 돌릴 때마다 번쩍이는 불빛

 

광시증에 걸린 지구를 위하여

누가 울고 있는가 하얀 깃발을 흔들며

누가 가고 있는가 하얀 깃발을 들고

 

<올해의 좋은 시(한국시인협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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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손이 아파서

시 -2 2006. 10. 7. 23:40

     

유령 손이 아파서

                                                         차옥혜

 

 

손이 없는 사람이

없는 손이 아파서 울고 있다.

머리는, 몸은

이미 썩어버린 유령 손을

또렷이 기억하고 현실로 느끼며

아파하고 있다.

 

아픈 지난 일을, 어두운 역사를

고통 없이 뉘우침 없이

용서와 화해라는 이름만으로 덮어버린다면

아름다운 미래와 참된 삶도 없다는 것을

살아남은 몸은

본능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한 번 맺은 인연

죽었어도

생전의 고통

고스란히 물려받아

거듭거듭 대신 아파서

다시 살려내고 있는

뜨거운 사랑일까

 

잃어버린 그에 대한

한풀이일까

간절한 그리움일까

 

갈라선 마음, 억울한 넋

불러 모아 하나로 얼싸안아

싱싱한 생명으로 꽉 찬

온전한 몸 행복한 우주를 이루고 싶은

꿈을 부르는 주술일까

 

유령 손이 아파서

그가 울고 있다.

 

<문학사상  200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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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집 앞에서

                                                             차옥혜

 

상트 페테스부르크 뒷골목 지하 도스토예프스키집에서

놀음을 즐겼다는

빚쟁이가 찾아오면 뒷문으로 도망갔다는

빚을 갚기 위하여 소설을 썼다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못 만나고

그의 흔적만 더듬다가

지하 계단을 오르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가

외국 관광객들에게

러시아 특산품 나무인형과 면숄을 팔고 있다.

이제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먼 나라까지 몸 팔러간 애인 소냐를 찾지 않는다.

나는 그 집 앞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서 있다.

그러나 빚쟁이를 피하여

어디서 ‘죄와 벌’을 다시 쓰고 있는지

도스토예프스키는 돌아오지 않는다.

팔다 만 물건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라스코리니코프의 그림자가

잠시 골목길에서 흔들리다 사라진다.

 

<시집 『허공에서 싹 트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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