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집 앞에서

                                                             차옥혜

 

상트 페테스부르크 뒷골목 지하 도스토예프스키집에서

놀음을 즐겼다는

빚쟁이가 찾아오면 뒷문으로 도망갔다는

빚을 갚기 위하여 소설을 썼다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못 만나고

그의 흔적만 더듬다가

지하 계단을 오르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가

외국 관광객들에게

러시아 특산품 나무인형과 면숄을 팔고 있다.

이제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먼 나라까지 몸 팔러간 애인 소냐를 찾지 않는다.

나는 그 집 앞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서 있다.

그러나 빚쟁이를 피하여

어디서 ‘죄와 벌’을 다시 쓰고 있는지

도스토예프스키는 돌아오지 않는다.

팔다 만 물건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라스코리니코프의 그림자가

잠시 골목길에서 흔들리다 사라진다.

 

<시집 『허공에서 싹 트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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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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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선생님 수기『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를 읽고

       - 가을 들녘에서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

 

  선생님!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에서 토란을 추수합니다. 지난여름 무서운 폭우에도 금시 빗물을 흘려버리고 싱싱한 마른 얼굴로 하늘을 마주보던 큰 잎을 꼿꼿이 받쳐주고, 스스로 독을 뿜어 어떤 병충도 막아내 주렁주렁 탐스럽고 굵직한 알뿌리를 땅속에 키운, 토란 대를 잘라 껍질을 벗겨내고 얇게 썰어 가을볕에 널어 말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들녘을 바라봅니다. 알곡과 뿌리와 잎과 알뿌리와 열매, 생명을 해산하고 누워있는 산모들! 껍질들! 쭉정이들! 누런 콩대, 깻대, 호박 줄기, 도라지 꽃대, 더덕줄기, 토란대 껍질 ……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보랏빛 벌개미취 꽃이, 흰 참취 꽃이, 늦봄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피고 지는 알록달록 백일홍이, 아직도 피어있는 능소화가, 과꽃이, 국화가, 맨드라미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벼들이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합창에 몸을 흔들어대며 끼어듭니다.

  합창은 소멸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영속을, 영원을 위해 생명을 낳고 생명의 대지로 우주로 귀향하는 승리자의 승리의 노래이고 환희의 노래입니다. 분명 소리는 없지만 마음과 영혼으로 듣는 합창입니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껍질들과 쭉정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가슴 벅찬 합창을 들으면서, 저는 선생님과 최근 출판하신 선생님의 수기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를 생각합니다. 한 예술가가 70 세를 넘기고 혼신의 힘으로 써낸 처녀작! 껍질과 알곡! 예술인과 예술!

  이화대학 음대 교수였고, 두 아들의 어머니였고, 천성적으로 대책 없이 순수하고 사랑이 넘쳐 강한 것엔 강하고 약한 것과 수난과 핍박 받는 것엔 한없이 부드럽고 눈물 많은 어머니였던, 선생님은,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근무하다, 독일 본 대학에서 정치학, 철학, 사회경제학을 공부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학위 논문을 쓰다, 군사독재정권의 공작정치의 산물인 동백림 사건에 연류 되어 3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8ㆍ15특사로 풀려나, 일거리가 없어 성당의 종지기라도 시켜달라고 신부에게 부탁하던 선량한 공광덕 선생님을 만나 열애에 빠지고 이혼하게 됩니다. 공 선생님을 구하러 독일로 건너가 독일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고 윤이상 교수 등을 만나 공 선생님을 독일에 망명하게 하시고 그 곳에서 재혼하십니다. 독일에서 두 분은 유럽에서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시고 김지하 구출 위원회도 만들어 활동하시며 독일의 지성과 훌륭한 작가들과 한국 교포들과 국내 최고의 지성과 양심세력과 교우하십니다. 한국에서 음악 교수로 얼마든지 화려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선생님은 독일에서 생계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게 됩니다. 거기다 공 선생님께서 암에 걸리고 암을 극복하기 위한 42일간의 단식을 선생님의 주도로 감행하게 됩니다. 그 단식 일지 사이에 선생님의 전 생애의 여러 사건들이 교직됩니다. 단식은 성공하여 공 선생님은 프랑크프르트 대학 “국제관계 정치학 연구소”에 다시 복직하셨지만 1 년 만에 다시 암이 발병하여 돌아가시고 맙니다.

  선생님의 책은, 이응로 화백의 감동적인 예술성도 소개되지만 무엇보다도 분단 조국 역사의 수레바퀴와 비민주적인 정치권력이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보여주고, 그 격랑에 천재적인 예술가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랑과 공 선생님의 지고한 정신과 많은 등장인물들의 맑은 영혼과 뜨거운 인간애가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가 됩니다. 동시에 이 책은 조병옥 선생님이 분단 조국의 민주주의와 인류의 평화와 자유와 정의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남편이 프랑크프르트 대학 법학과 객원교수로 유학해, 우연히 프랑크프르트 위성도시 노이이젠브르크 2 쉬발벤쉬트라쎄에 있던 선생님 댁 바로 옆 골목에 살게 된 때였습니다.

  선생님 댁은 싸르트르의 카페처럼, 유럽 지성과 양심과 예술의 메카였고, 한국 해외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선생님 예술의 공연장이기도 했습니다. 자주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좋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얼마나 사람들의 지평을 넓게 하고 삶을 풍부하고 즐겁게 하는 것인가를 그 곳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 댁엔 인문학과 예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자유가 있고 꿈이 있고 사람이 있고 사랑과 신이 있고 자연이 있었습니다. 거실엔 싱싱하게 자라는 풀꽃들이 있었고 노이이젠 부르크를 에워싼 광활한 숲에서 불어오는 상쾌하고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요. 선생님은 요리도 참 잘하셨습니다. 손님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셨지요. 선생님은 참으로 부지런 하셨고 일과 사람에 최선을 다하셨지요.

  때때로 선생님은 직접 작곡한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입니다”, 양성우 시인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시를 보는 눈이 시인 이상으로 예리하셨고 저보다 시를 더 많이 읽고 계셨습니다. 저는 가끔 선생님께 미흡한 제 시를 보여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제 시 “기도 2”에 곡을 부쳐주셨고 유럽 교포신문에 발표도 해주셨지요. 선생님은 일상에 매몰되는 제 시심을 자주 일깨우셨지요.

  제가 뜻밖의 병으로 입원하게 되자 선생님은 저보다 더 많이 울고 슬퍼하셨지요. 그렇게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어느 이른 봄날 제가 제 집 길 쪽으로 난 거실 창밖 나무에 맺힌 수많은 이슬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는데, 길 건너편 슈퍼마켓 쪽으로 걸어가는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같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선생님의 모습이 쓸쓸하고 우수에 차 보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밝고 환하고 발랄하고 재치 넘치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떠나서 살아야하는 망명자의 얼굴일까?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는 예술가의 얼굴일까? 선생님이 사라지신 뒤에도 저는 움직이지 않고 선생님의 또 다른 모습을 오래도록 상기하고 있었습니다.

  1984년 저희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프랑크프르트 공항에, 항상 부드럽고 인자하시고 사람들과 담소하기 좋아하시던 공광덕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아무 말씀도 못하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셨지요. 마음대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저희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리워도 고향에 갈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가슴! 저 역시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몰라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두 분을 뒤로 한 채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두 분 선생님들의 호수 같은 큰 눈이 제 앞에서 떠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던 저였는데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습니다.

  눈부신 조병옥 선생님!

  『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를 읽으면서, 다 읽은 후에도 "조병옥 선생님 만세!"를 외쳤습니다. 조선생님과 공광덕 선생님과 두 아드님 호정이 호산이 모두 삶의 승리자이십니다.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이 수기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빛으로 엮어진 삶의 무늬들! 아프고 눈부십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선생님은 선생님과 공광덕 선생님과 사람과 사람세상과 역사를 영원하게 하셨고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참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큰 일 하셨습니다.

  조 선생님! 문학의 성과에서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보다 더 감동스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바고의 라라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롭고 아픕니다. 공광덕 선생님은 지바고보다 더 따뜻하고 깊고 멋지십니다.

  선생님은 과연 예술의 덩어리입니다. 선생님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한 예술의 힘은 음악을 넘어 문학에서도 이 처녀작 한 권으로 선생님이 얼마나 큰 작가이신가를 보여주시네요. 문장의 아름다움과 힘과 독창성 그리고 내면의 깊이와 폭넓은 시야가 독자를 설레게 합니다.

  인간과 삶과 세상과 세계와 우주와 신을 품은 선생님의 큰 가슴이 장엄합니다.

  프랑스의 여성작가 뒤라스는 노년에 젊은 날 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앞으로 많은 걸작으로 인간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하는 빛이소서.

  온 마음으로 다시『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를 축하드립니다.

 

                                                     2006년 10월 5일
                                                                              차옥혜 올림

 

                                            <소리없는 그리움 -2006년 서간문집(한국여성문인회)  2006>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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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스승 아버지께
                          - 1주기 추도예배에서 -

  아버지!

  아버지! 부르면 꽃향기가 온몸에 쏴하게 번지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대나무 잎새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82세의 일기로 육신의 집을 떠나신지 벌써 일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난 일 년 내내 저와 함께 하셨고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많은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 속에, 줄장미가 피면 줄장미 안에, 아버지가 사시던 거리거리에, 아니 천지사방 모든 곳에 밤이나 낮이나 아버지는 계셨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벗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아버지를 추모하는 이 자리에 함께 계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으로 아버지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믿고 지키고,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고, 함께 나누려고 하신 삶의 승리자였습니다. 최후의 숨결까지 병과 죽음과도 치열한 싸움을 하신 것도 운명을 개척하고 불가능에 끝까지 도전하여 삶의 차원을 높이고 지평을 확대하려는 불굴의 의지셨습니다.

  2년 전 심근경색과 뇌졸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투병하면서도 매일 노쇠한 몸을 이끌고 수서의 산자락에 가셔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사마리탄 제자들과 교인들의 이름을 낱낱이 부르며 축복기도를 하셨고, 강도 만난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의 치유를 위하여, 불의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병을 이기시려고 비나 눈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15층까지 몇 번이고 오르내리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혈관질환이 호전되는 듯 했는데 지난해 가을 느닷없이 위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위암 때문에 혈관 치료를 할 수 없게 되면 언어장애를 일으켜 의사소통을 못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셨습니다. 검사결과, 몸의 여러 기관의 기능이 이미 손상되어 가족들과 의사들은 한사코 위험한 수술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단 한 명의 혈관 담당 의사의 낙관적인 전망에 희망을 거시고
  “삶은 끝없는 도전과 모험이며 절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는 거야. 수술을 안 하면 나날이 죽어 가는 것 밖에 더 있겠느냐? 하루를 살아도 나는 바보로 살기는 싫다. 내가 살면 하느님을 증거 할 것이고 죽으면 하느님 곁으로 갈 거야”
라고 말씀하시며 수술을 고집하셨습니다.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아픈 당신을 두고 갈 수 없어서 건강한 몸으로 당신 곁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수술을 하는 거야”
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삶을 껴안고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빛 가운데로 끌어올리려 끝없이 삶을 개척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운용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역시 병마가 침범한 몸의 극한상황도 뛰어넘으시려고 결단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전엔 어떤 경우에도 좌절이란 없었습니다. 이런 정열과 힘은 하느님이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신앙의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편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셔서 이 세상의 조그만 섭섭함도 다 용서하시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살라고 당부하시며,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하시고, 초연하게 천사처럼 맑은 얼굴로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저는 하느님이 아버지를 안고 함께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시울에 이슬이 맺혔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빛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버지는 용감하시고 위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적처럼 악 조건의 수술을 이기시고 깨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아버지의 병세가 생각보다 더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말기 암을 안고도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인간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으로 말없이 고통을 참고 견뎌내신 때문이었습니다. 수술 이틀 후 심장이 멈추었으나 심폐소생술로 다시 호흡하시며 말씀은 못하셨지만 간혹 눈을 뜨시고 입술을 움직이시며 20일 동안 버티신 것은 참으로 아버지의 생을 지키시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삶의 승리자가 되었듯이요.

  아버지께서는 13살 어린 나이에도 병든 할아버지를 위하여 개울을 막아 벼를 심어 약을 사드렸습니다. 마지막까지 42세에 아버지를 나으신 할머니를 잊지 못하시고 지난해 봄과 여름 내내 일생을 되돌아보며 할머니께 바치는 긴긴 편지를 쓰시기도 했지요.

  참으로 아버지의 일생은 도전과 의지와 신념과 사랑으로 점철된 한 평생이셨습니다.

  전북 김제 군 금산면에서 한학을 하며 동네 서당을 했던 할아버지와 불심이 깊고 미인이었던 할머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던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독립투사 고모부와 독립투사의 조카인 친한 친구를 통해 민족의 고통에 눈을 뜨시고 불쌍한 중생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싹텄습니다. 서울 어느 고등학교에 입학하셨다가 학비가 없어 그만두고, 17 세에, 큰 형이 농사를 짓게 하려고 일찍 결혼을 시켜 이미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가난한 가장까지 되었습니다.

  충청도 어느 탄광에 사무직으로 근무하면서도 열심히 독학을 하며 야학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의 문맹을 깨우치는데 열정을 바쳤습니다.

  21세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하여 일제시대 1,144명 응시해서 조선인 69명, 일본인 42명이 합격한,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자격시험인,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22세에 대학입학 자격고시인 검정고시 전검에 합격하셨습니다.

  서울에서 조선총독부에 취직하시고, 서울 종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인들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극을 만들어 주인공 역을 맡아 순회공연을 하셨습니다. 한편 민족 지도자들이신 김구,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선생님들과 청년 목사 강원용 목사님을 만나 민족과 조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일제의 학병징집에 저항하여 5 년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라북도 도청 사회과 계장으로 발령받고 전주에서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직장을 그만두고 전국 기독청년회 전북지부를 창설하고 안재홍 선생이 이끄는 신생회 전북지부 회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의 자주 통일 정부를 세우는 운동에 힘을 바쳤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충돌을 극복하고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자주적 통일 정부를 세워 분단을 막아야만 민족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당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급박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민족의 분단과 육이오 전쟁도 없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50여 년이나 많은 민족이 불행을 격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 땅에서 통일조국과 눈부신 인권신장과 문화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정의롭고 선한 정치세력 신장과 결집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국회의원 출마도 두 번 하셨고, 1950년 5월 10일 총선에서는 표로는 이기고 표 조작으로 낙선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때, 전주가 북한군에 점령되자, 피난을 못 간 대부분의 전주시내 목사님들과 장노님들이 모여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아버지를 협상자로파견하기로 했는데, 서른세살 청년아버지는 두려움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전북 보위부장을 찾아가 설득하여 전북에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다치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는, 마침 그의 평양에 있는 아버지도 장노님이라며 기독교인들을 적극 보호해주고, 퇴각하면서도 그 시간을 비밀리에 알려줘, 기독교인들의 피신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아버지는 긴 세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시 대한민국이 돌아오자 목사님들의 목숨을 구한 아버지의 용기 있는 행동을 만천하에 찬양하고 증언하겠다던 목사님들은 자신들에게 혹 피해가 될까봐 모두 입을 다물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육이오 전쟁 직후 식량이 없어 굶고 있는 자식들을 이끌고 들과 언덕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영혼의 밥을 퍼주셨습니다. 그것은 극기 훈련이여서 자식들에게 세상을 살면서 어떤 극한상황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주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청소년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교육계에 몸담고 기독청년과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강도 만난 이웃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이 땅에 평화와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모든 인간이 꽃이 되게 하려는 사마리탄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운동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진리가 걸핏하면 왜곡되는 분단의 현실에서 청소년들의 얼을 일깨우고 역사를 바르게 보게 하여 나와 이웃과 민족과 나라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바른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선을 이루며 나를 벗어나 타인을 배려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로 살자는 사랑의 정신운동이었습니다.

  저는 사마리탄 입회식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살던 저는, 타오르는 촛불 밑에서 입회선서를 하며, 보이지 않는, 그러나 확실히 존재하는 타인과의 연대를 이루는 하느님의 깊고 넓은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며, 그 성스러운 체험에 열여섯 살 소녀 차옥혜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제 육신의 아버지이면서 세계와 우주로 향한 문을 열어주신 제 스승이었습니다. 현재의 밀림에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시는 영혼의 인도자였습니다. 제가 세속에 물들어 갈대가 되고 빛을 못 보는 부엉이가 되다가도 아버지의 사랑의 불길로 세우신 정신의 고향 사마리탄이 있어 맑은 영혼을 수혈 받고 저를 추스릅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가난하여 온 가족이 방 한 칸에서 자주 살았던 탓으로 언제나 찾아온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모아놓고 진실을 깨우치고 진리를 보여주려고 열정을 가지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쳐 이웃들이 진정한 평화와 자유 속에 살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목매어 기도하시던 아버지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저는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와 말씀은, 제 영혼의 밥이었고, 모국어의 싹이었고, 제 문학 수업이었고, 시였고, 끝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는 종소리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통합이며 통찰이었고, 우주와 영혼과의 만남이었으며, 참 세상과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른 나무가지인 저를 오늘 삶의 진수를 길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한 시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윤보선씨와 박정희씨가 입후보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씨가 당선되면 군사정권이 들어서 민주주의가 그만큼 더디게 온다고 윤보선씨를 당선시켜달라고 사마리탄 김광택 김정숙 나철삼 등을 데리고 이 자리 남문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바른 역사와 정치가 집단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일깨우기도 하셨지요. 비록 우리의 기도와는 틀린 결과로 긴 군사독재시절이 시작되었지만요. 아버지의 일깨움으로 많은 제자들이 불의에 맞서는 저항운동을 하였고 옥고를 치르는 이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60이 넘으신 연세에 중고등학교 교장자리를 사임하시고 한국신학대학 학생이 되셨고 졸업 후 목사님 안수를 받으시고, 초음교회를 세우셔서 하느님 품에 많은 신도들이 안식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목자로서 생의 남은 열정을 불태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숨어있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하셨습니다. 목욕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변기에 사용하셨습니다. 휴지 한 쪽도 낭비하지 않으시고 최소한의 것을 사용하며 근검 절약하시면서도 가엾은 사람들을 돕는 일엔 아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은, 언제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셨으며 꿈과 열정으로 가득 차, 한 알의 씨앗만 떨어져도 풀이 돋고 꽃이 피는 옥토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를 보시면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만년 청년이셨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연세에도 6․10항쟁에 참가하셔 종로로 광화문으로 돌아다니시며 시위를 하다 최루탄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벌이 자신의 세계를 건드리면 즉각 저항하여 침입자에게 침을 쏘고 죽듯 아버지께서는 인간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독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어머니, 옥조 언니, 갑건 오빠, 세건이, 옥숭이, 옥신이, 그리고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 많은 사마리탄 제자들과 아버지의 친구들과 교우들이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는지 아버지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지난 어느 가을날엔 아버지의 산소에 일곱 개의 꽃다발이 놓여있기도 했었지요. 그 그리움과 사랑 속에 아버지의 사마리탄 정신, 사랑의 불꽃도, 영원할 것입니다.

  저의 넋이고 대지이고 고향인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아버지이고 스승이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영원토록 저는 아버지의 딸이고 제자인 것을 행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사랑의 불꽃을 제 가슴에 당겨 남은 여생을 아버지처럼 아름답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아버지!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늘에 별로 뜨셔서 하느님과 함께 삶의 진실한 길을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2000년 전 동방박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별처럼 말입니다.

  제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는 아버지시여! 스승이시여!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1년 12월 4일

                                                               딸이고 제자인 옥혜 올림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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